'마음 먹기'가 불가능해진다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의지만 있으면 못할 게 없더라.”
오랜만에 연락 온 고등학교 친구 B에게 내 심정을 알렸더니 이렇게 답했다.
B는 매사 열심히 부딪히는 사람이다.
나도 B의 말처럼 굳은 의지를 가지고 살려고 노력해 왔다.
거기서 허점을 발견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의지는 어디서 오는가?
뇌에서, 특히 목표를 향한 행동을 조절하는 전두엽에서 온다.
차라리 다른 곳에 생긴 질병이었다면 내 전두엽을 쉽게 믿었을지도.
하지만 지금 전두엽을 감싸는 뇌막에 걸친 종양이 있다.
무턱대고 해당 뇌 부위가 다 해결해줄 거라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마음을 먹을 때 쓰는 뇌 부위가 손상된다면 어째야 하나?
나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B의 따뜻한 말이 정말 고마웠지만 뇌종양의 진실은 가혹했다.
나는 세 번의 진로 수정을 거쳐 의대에 편입했다.
첫 번째 꿈은 천체물리학 연구원이었고, 관련 전공을 했으나 훌륭한 연구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졸업 후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려 했는데,
회사를 위한 업무보다 상사 눈치를 보는 일이 더 중요한 상황을 버티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며 과학 기자를 준비하다가,
결국 퇴사하고 약대 편입 (PEET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다 예상 밖으로 의대에 합격했다.
의학은 내 적성에 꼭 들어맞았다.
물리나 천문을 공부할 때는 광활한 우주에서 갈피를 못 잡는 기분이었는데, 의학은 입에 쫙쫙 달라붙었다.
의대 공부는 방대한 자료를 소화해 인체와 질병에 대한 이해를 도출하는, 딥러닝에 가까운 과정이다.
의대 가라는 고교 담임쌤의 권유를 몇번이나 뿌리치고 자연대를 갔었는데,
정작 의학을 더 잘하고 즐기는 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의대에 들어와 첫 목표는 ’유급하지 않기‘ 였다.
흔히 만 28세의 뇌보다 만 20세의 뇌가 쌩쌩하다고 말하고,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똑똑한 20세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다소 어이 없게도
지금까지 전액 또는 바로 그 아래 급의 장학금을 받고 의대를 다녔다.
인정하기 싫지만, 자존감이 낮았나 보다.
나는 ‘의대 전액 장학금’을 일종의 자신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뭐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머리가 좋다는 자아상은 어릴 때부터 항상 내 존재의 근간을 차지해 왔다.
‘운동을 못하고, 인간 관계가 서툴지만 나는 똑똑하니까 그런 것 쯤 못해도 돼.
아니, 오히려 못 하는게 더 멋있지’
라는 자기 합리화는 서울대를 다닐 때 한번 처참히 깨졌으나,
의대 전액 장학금 사건으로 인해 다시 불이 붙은 것이었다.
이제 인간 관계는 평범한 수준 정도로는 할 수 있게 됐지만.
뇌종양 진단은 거기에 다시 찬물을 들이부어 버렸다.
죽는 순간까지 머리가 좋을 줄 알았던 나였다.
어떤 역경이 있어도 전두엽에서 비롯된 의지와 성실함으로 돌파할 거라고 굳게 믿었던 나였다.
이제 앞날 걱정은 좀 내려놓아도 되는 줄 알았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