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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부정-분노-타협 건너뛰고 우울

자아가 흔들리는 경험

by 저삶의

부정 - 뭐라고? 오진일 거야. 결과가 잘못 나온 거야. 내 몸은 내가 알아. 이렇게 멀쩡한데 암인 게 말이 안 되지.

분노 - 내가 왜? 왜 하필 난데?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타협 - 이제부터 도박도 끊고 착하게 살게요. 교회나 절도 매주 나갈게요. 적십자사에 기부도 할게요. 그러니까 살려 줘요.

우울 - 하…내가 암이라니. 이렇게 아프고 후유증 겪으면서 계속 살아야 하나.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스스로가 너무 불쌍해.

수용 - 그래 나 암환자다. 병원 다니고 약 먹고 관리하는 데 집중해야지.


시한부 선고나 암 진단을 받으면 사람들은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줄여서 '부분타우수')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내 뇌종양은 암도 시한부도 아니지만 난 어쩐지 비슷한 단계를 겪었다.


‘머리 좋은‘ 상태가 생각보다 일찍 막을 내릴 수 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여느 환자와 다르게 내게 부정 단계는 없었다.


MRI가 없는 뇌종양을 만들어서 보여주는 게 아니니까, 부정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MRI는 수소원자가 회전하는 방향을 통해 영상을 구성한다.

누가 뭐래도 뿌연 판 초콜릿 형태의 덩어리는 증식된 뇌막의 일부였다.


자연히 분노라는 감정은 생겼지만, ‘분노 단계’라 할 만한 건 없었다.


“왜 하필 내가?”라는 질문에 나는 다시 “왜 너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라고 물었고,

이어서 할 말은 없었다.


뇌수막종은 만 30세 10만명 중의 1명은 진단받는 질환이다.

대한민국에 나와 동갑인 1994년생은 72만명 정도가 있으므로 그 중 7명은 뇌수막종 판정을 받는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케이스까지 합치면 더 많을 것이다. 이 정도면 로또 2등 당첨 확률보다도 높다.

내가 당첨되지 말라는 법이 없음.


타협도 없었다.


뇌수막종은 원인 불명이다.

상대의 패를 모르는데, 무슨 수로 협상을 할까?

어쩌면 지금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게 기나긴 타협 단계인건 아닐까 싶다.


그러나 2~3부에서 설명하겠지만,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착하게 살테니 낫게 해주세요‘, ’얼마를 기부할테니 낫게 해주세요‘ 따위의 근거 없는 기도 메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즉 ’부분타우수‘ 모델에서 설명하는 타협에 해당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한동안 우울에 축축 젖어 있었다.


아래는 당시에 내가 쓴 글 일부이다.

방사선치료에 대해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련 내용이 있다.




그건 내 쌩쌩한 기억력이나 집중력이 시한부일수도 있기 때문이고

그러면 내 기존 자아의 상당 부분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똑똑한 것 외에도 착한 편이고 위트있고 편견이 적고 여러 재주가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착각일수도 있지만 이런 다양한 장점들마저 빠른 두뇌회전에 기반하고 있는 걸로 느껴진다.

예를 들어 대화를 나눌때 상대방의 정보를 기억해서 세심하게 물어봐준다거나 상대방도 웃을만한 개그를 친다거나 하는 것.

노래를 부를 때 곡의 진행을 기억해 알맞은 곳에서 숨을 쉬는 것.

기분이 나쁠 만한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해 화를 내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

이런게 좋은 머리에 기반한게 아니라면 제발 반박을 해주시길 바란다.


어떤 역경이 와도 견디고 이겨내고, 잠시 쉬어갈 기회로 받아들이기?

그런 일 마저도 뇌는 정상이어야 가능하다.

멘탈은 곧 뇌니까.


방사선치료의 부작용은 acute, intermediate, late로 대충 나누어지는 것 같은데

보통 환자들이 걱정하는 건 acute, intermediate이다. 왜냐 하면 late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나는 방사선치료 수개월~수년 후 나타날 수 있는 late 후유증이 가장 우려된다.

방사선 부작용에서 late은 곧 permanent를 의미하니까.

영구적 기억력 손상, 집중력 감소, 실행능력 감퇴.

그런 후유증을 쳐맞는다는건 곧 내 자아의 부분적 사망선고나 다름없이 느껴진다.


일단 지금 이 순간 나는 분노와 우울에 저농도로 절여져 있다.

이처럼 또렷한 생각을 가지고, 머리속에 온전히 저장된 노래를 플레이하며,

빠른 두뇌회전에서 비롯된 재치있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 길을 걷는 게, 이 사람을 만나는 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안 좋은 상황이 일어날 확률은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그래야 한다면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될 것이고

지금의 사고력을 가진 나로서의 삶을 누릴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뭐,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방사선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모든 사람에게서 방사선 late 부작용이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실명되거나 목숨이 위태롭기 전 치료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휴 다행이다..”라고 할 것 같다.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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