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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Jan 24. 2020

〈이웃집 토토로〉와   미르치아 엘리아데②

신화학적 관점에서 본 토토로 이야기

이웃집 토토로와 신화 분석 : 3~5번째 시퀀스


이전 포스트(https://brunch.co.kr/@doxa/51)에서 우리는 〈이웃집 토토로〉의 처음 두 시퀀스가 '도깨비집(근대 사회로부터 유리된 상상적 공간)'으로의 진입, 통과, 세계 창조의 의례적 재현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여러 겹의 긴장 관계를 조성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이어지는 세 시퀀스(병문안 씬 ~ 나무 열매 발아 씬)를 따라가면서, 첫 시퀀스에서 제시된 긴장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고 변화해 가는지 분석해보기로 하자.



1. 불구(不具)적 어른들 - 어린이의 등장


영화의 두 번째 시퀀스는 사츠키네 가족이 다 함께 엄마의 병문안을 가는 씬으로 시작한다. 첫 시퀀스에서 엄마가 등장하지 않았던 이유가 밝혀지는 장면이다. 그다음은 등교 준비 씬이다. 사츠키는 늦잠을 잔 아버지 대신 도시락을 준비한다.


이는 사츠키와 메이라는 캐릭터의 배경과 성격을 관객들에게 보여 주는 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아이들이 서사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나서는 씬이기도 하다. 해당 씬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어머니는 병으로 인해, 아버지는 늦잠으로 인해 아이들을 돌보지 못한다. 돌봄이란 보호이자 통제다. 즉, 이 씬으로부터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이에 아이들은 어른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세계와 마주해야만 한다.



서사 내적인 맥락이 이렇다면, 상징적인 맥락과 견주어 보았을 땐 또 다른 모습이 보인다. 부모 중 무력함이 더욱 강조되는 것은 어머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아이들 곁에 있으나, 어머니는 아예 격리되어 있다. 어머니라는 기호가 여러 신화 속에서 대지모(大地母)의 상징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는 사츠키와 메이에 이입하여 영화를 관람하고 있을 관객(현대인)들과 결부된 메타포가 된다.  근대적 생활방식으로 인해 자연으로부터 유리된 인간의 모습이 어머니의 입원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2. 메이와 토토로 - 아노미와 자연회귀


본격적으로 영화의 주인공이 된 두 아이들 중 먼저 토토로를 만나는 건 메이다. 마당에서 뛰놀던 메이는 우연히 도토리를 모으던 꼬마 토토로들을 발견하고, 이들을 쫓던 중 녹나무 둥치 속 구멍으로 떨어져 토토로를 만난다.


어째서 사츠키가 아니라 메이일까? 이는 메이가 사츠키보다 어리고 순수하기 때문이다. 이때 순수란 원초적 자연성에 가깝다는 의미인데, 영화는 병문안 씬에서 이를 이미 암시하고 있다. 앞선 병문안 씬에서 모녀들의 화제는 머리카락이다. 이때 메이는 머리가 긴 어머니의 모습과, 사츠키는 머리가 짧은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 있다. 사츠키와 달리 학교라는 근대적 생활방식에 진입하지 않은 메이의 모습이 시각화된 것이다.


이러한 잠재성은 '규율 체계의 실종'이라는 위기 앞에서 발현된다. 부모가 서사에서 배제된 이후, 메이의 행동을 규정하는 것은 사츠키(를 닮고자 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사츠키 또한 학교로 떠나자 메이는 자신이 속해 있던 기존의 규율체계로부터 완전히 이탈해버리게 된다. 메이와 자연의 만남은 이러한 아노미로부터 촉발된다.



그렇다면 메이와 토토로의 만남은 무엇을 의미할까. 해당 씬은 영화 내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지만, 그것이 '인간과 자연의 만남'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 이상의 무엇인지를 정확히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해당 씬에 서사적인 필연성이 없기 때문이다. 씬은 앞뒤 씬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사건을 전개시키거나 갈등을 심화시킨다기보단, 그 자체로 완전한 듯한 충만감을 선사한다. 이는 기승전결을 갖춘 사건의 체험이라기보단 일종의 신비체험(numinous)에 가까운 것으로, 영화 전체 원체험처럼 기능한다. 이를 보다 심층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다시 신화 분석의 방법론을 취해보기로 하자.


토토로를 만나기 전까지, 메이가 옮겨 다닌 공간을 순서로 나열하면 이렇다. 올챙이가 헤엄치는 물웅덩이, 마루 밑 으슥하고 어두운 공간, 풀숲 속 터널, 녹나무 둥치의 구멍. 이들 공간은 모두 하강의 이미지를 가진다. 이들 공간에 도달하기 위해 메이는 쪼그려 앉거나 고개를 숙여야 한다. 또한, 메이는 실제로 녹나무 둥치 아래로 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하강의 이미지는 신화 속 상징적인 매장(埋葬)에 해당한다.



상징적인 매장은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물속에 잠김, 세례와 동일한 주술·종교적인 가치를 지닌다. 환자는 그것을 통해 재생되고 새로 태어난다. 이러한 조치는 죄를 씻어내거나 정신병을 치료하는 경우에도 동일한 효과를 가진다. 그때에 그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두 번째로 태어나는 것이다" (…) 그가 묘지에서 일어서면 그는 새로운 인간으로 인정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한 번 더 태어났기 때문인데, 이번에는 직접 우주적인 어머니에 의해서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M. 엘리아데, 『성과 속(Das Heilige und das Profane)』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곧 땅을 향하는 것, 이미지화된 매장이다. 신화 속에서 이는 부활을 포함하는 죽음이고, 대지모로의 회귀다. 이때 죽음이란 존재의 최종적인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과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준비 단계에 해당한다. 이러한 죽음-준비 단계에서 메이는 토토로를 만난다. 이때 메이는 토토로를 따라 포효하고, 토토로를 따라 잠들면서 자연의 규율을 내재화한다. 다시 말해 메이와 자연의 만남은 회귀와 모방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를 통해 메이는 아노미를 극복하고 자연적 인간의 새로운 규율체계로 진입하게 된다.




3. 사츠키와 토토로 - 붕괴되는 규율과 신성한 농경


시퀀스가 끝나며 메이의 존재론적 전환이 마무리된 후, 사츠키는 다시 영화의 중심에 소환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사츠키 역시 메이처럼 아노미 속에서 자연으로 회귀하며 존재론적 위기를 극복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사츠키는 메이보다 근대 사회적 규율에 익숙해져 있는(마치 우리 같은) 인물이므로, 사츠키의 경우 같은 과정이 보다 극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사츠키는 학교 안의 존재로 제시된다. 학교는 인위적 규율에 의해 인간을 통제하는 공간으로, 그러한 규율에 의해 사츠키와 메이는 격리되었다. 그러나 토토로와의 만남 이후, 메이는 사츠키를 만나러 학교에 온다. 자연적 인간으로 거듭난 메이에게 기존의 규율은 무용지물일 뿐이다.



메이의 방문 이후 사츠키를 둘러싼 세계에도 파문이 일어난다. 학교가 파한 후 하늘에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에 아이들은 돌부처를 모신 사당에서 비를 피하다가, 이웃 아이인 칸타가 빌려 준 우산을 쓰고 귀가한다.


아이들의 하교 과정에선 건물의 이미지가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학교는 물론이고, 사당과 우산까지 이에 해당한다. 다만 학교의 규율이 파괴되었음에서 알 수 있듯, 건물의 이미지 또한 기호적 변화를 거듭할수록 약화된다. 번듯한 건물이었던 학교는 작고 초라한 사당이 되었고, 우산에 이르러서는 구멍이 숭숭 뚫려 비를 완전히 막아주지도 못하게 된다.


건물의 약화는 곧 비를 맞는 일로 이어진다. 건물의 이미지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었으므로, 비를 맞는 일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집에 무사히 돌아왔던 아이들이 스스로 빗속으로 나서는 것은 그래서다. 그것은 차라리 숙명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 아이들은 칸타네 집에 들러 빌린 우산을 돌려준다. 수복 불가능해질 만큼 무너진 규율의 세계를 아이들 스스로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빗속으로 나선 아이들이 도착한 곳은 버스정류장인데, 이곳은 어두운 터널과 닮아 있다. 앞서 여러 번 이야기했듯 비(물)와 터널은 부활을 포함하는 죽음, 재생을 전제하는 파괴의 상징이다. 이곳에서 사츠키는 메이(자연적 인간)를 제 몸으로 짊어지면서 토토로와 만나게 된다. 이로써 사츠키는 메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성적 체험을 통한 존재적 전환을 겪는다.


이때 사츠키의 전환이 메이의 그것과 비교해 유형적인 결과물을 남긴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사츠키는 토토로에게 우산을 건네는데, 이에 기분이 좋아진 토토로는 고양이 버스를 타고 떠나기 직전 사츠키에게 나무 열매가 담긴 꾸러미를 준다. 아이들은 정원에 조그만 밭을 만들어 열매를 심는다.



이것은 농경이다. 메이와 토토로의 만남이 자연적 질서로의 회귀를 통한 인간 존재의 전환을 보여주었다면, 사츠키와 토토로의 만남은 그러한 회귀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자연과 인간의 순환적 교류로서 농경을 제시한다. 사츠키는 토토로에게 우산을 주었고, 토토로는 열매를 주었으며, 사츠키는 이를 다시 땅으로 돌려보냈다. 이러한 순환의 고리가 성립되자 토토로는 다시 나타났고, 토토로와 아이들은 힘을 모아 거목을 키워낸다. 이것이 근대적 산업으로서의 농업과는 다르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제 아이들은 토토로와 함께 하늘을 날아다닌다. 이때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바람이 된 거야!" 앞선 첫 번째 시퀀스에서 바람은 아이들을 위협하는 힘이었으나, 이 씬에 이르러서는 아이들의 존재 방식이자 내적인 동력이 된 것이다.



이로써 아이들의 존재적 전환은 모두 마무리된다. 근대적 규율의 붕괴 상황에서 자연적 질서로 회귀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 나아가 순환적 교류라는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일구어 낸 사츠키와 메이. 바람을 타고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어떤 울림이 느껴진다면, 당신도 삶의 어느 순간에서 토토로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③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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