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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Jan 17. 2020

〈이웃집 토토로〉와  미르치아 엘리아데①

신화학적 관점에서 본 토토로 이야기


1070만 헥타르. 건물 5900여 채. 동물 5억 마리. 그리고 사람 28명. 최근 호주에서 일어난 산불이 집어삼킨 것들이다. 4개월 동안 호주 면적의 3분의 1에 가까운 지역이 화재 영향권에 들었고, 이에 10만여 명이 재민이 되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화재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온 건조한 호주의 여름이 12월~2월까지 계속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번 화재가 3월은 되어야 끝날 수 있다는 우려도 괜한 걱정은 아니다.



이토록 끔찍한 대화재의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기후 변화'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인도양 서부와 동부의 표면 수온이 불균형을 이루는 '인도양 쌍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호주의 폭염과 가뭄 또한 극심해졌다. 지난 1월 4일 시드니 서부의 낮 최고기온은 48.9도였다. 이는 다시 말해 이번 화재를 어찌어찌 진압하더라도, 앞으로 더욱 강력한 산불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제 환경 보호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습니까(How dare you)!"라 일갈하는 그레타 툰베리의 주장처럼, 해결책은 신속하고 근본적이어야 한다. 이는 곧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는 뜻이며, 나아가 우리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살펴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 トトロ)〉(1988)다.





이웃집 토토로와 신화 분석 : 첫 번째 시퀀스


〈이웃집 토토로〉를 요약하면 이렇다. '사츠키'와 '메이' 가족이 시골집으로 이사 와 살아가는 이야기. 영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서사의 뼈대를 이루는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여동생 '메이'의 실종은 물론 유의미한 사건이지만 극 전체를 견인할 만큼 강력한 갈등은 아니다).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투쟁담도 아니고, 진귀한 보물을 찾으러 나서는 탐색담도 아니다. 따지자면 성장담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물의 결핍이나 변화가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 요소인 것도 아니다.


Mircea Eliade, 1907~1986


이처럼 영화는 매우 단순하다. 따라서 서사의 전개 양상과 내적 구조만을 가지고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보다 유의미한 해석을 위해서는 ①극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아닌 다양한 긴장 관계가 생성되고 해소되는 각축장으로 파악해야 할 뿐만 아니라, ②극중 사용되고 있는 이미지와 기호가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분석하는 작업 또한 필요하다. 특히 ②의 분석에는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신화 분석이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다.



1. 강과 다리의 이미지 - 구분과 통과



우선 첫 번째 시퀀스를 보자. 〈이웃집 토토로〉의 첫 시퀀스는 꽤나 중요한데, 영화를 구성하는 세계관과 긴장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츠키와 메이 가족이 이삿짐을 가득 실은 트럭을 타고 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이때 이들 가족은 개울을 넘는 다리와 나무로 이루어진 터널을 통해 새로운 집에 도착한다.


엘리아데를 비롯한 종교학자들이 세계 각 지역의 신화와 민담을 비교분석한 바에 따르면, 의 이미지는 '이곳'과 '저곳'을 나누는, 즉 공간을 질적으로 구분하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불교의 삼도천이나 고난의 땅과 복된 땅을 가르는 기독교의 요단 강처럼 말이다. 영화가 두 공간을 의식적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증거는 프레임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86분의 러닝타임 동안 두 공간이 한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장면은 단 한 숏도 없다.



이처럼 '이곳'과 '저곳'은 질적으로 다른 세계이기에, 이를 통과하는 인간 역시 질적인 변화를 겪어야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 바로 '죽음과 부활'이다. 죽음과 부활은 가장 근본적인 존재론적 전환이다(예수의 예가 적합할 것 같다). '다시 태어난 것 같다'는 관용구도 있지 않은가! 이러한 죽음과 부활은 신화 속에서 통과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다리 동굴(터널)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단군 신화 속에서 곰이 동굴을 빠져나오며 웅녀가 된 것처럼 말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강과 터널을 기점으로 마을과 집은 질적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이를 횡단하면서 존재론적 전환의 대상이 된다. 다만 이는 아직 유의미하게 발현되지 않았다. 영화는 아직 시작일 뿐이다. 이 단계에서 이들은 잠재적인 전환의 가능성을 획득할 뿐이다.



2. 세계수(世界樹)와 기둥의 이미지 - 창조의 재현



어쨌든 이들은 새로운 세계에 진입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세계란 어떤 공간인가? 이들이 도착한 새 집은 뭐랄까, 붕 떠 있는 느낌을 준다. 붓꽃과 야자수와 녹나무가 한데 모여 있는 이 곳은 현실에 존재하는 익숙한 공간이라기보다,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상상 속의 공간인 것 같다. 집이 현실과 어울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이유는 마을과 집이 정치·사회적인 연관을 맺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집은 마을과 상호작용하며 존재하는 커다란 유기체적 세계의 일부라기보다, 그 자체로 완전한 하나의 세계다.


집에 도착한 사츠키와 메이가 가장 처음 한 일이 문간의 기둥을 세우는 일이라는 점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게 보인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아무도 살지 않던 빈집으로, 지저분하고 어질러졌으며 동물과 괴물들이 숨어 사는 혼돈스러운 세계(Chaos)다. 그러나 인간은 카오스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으므로, 이를 의미화하고 구조화하여 조화로운 세계(Cosmos)로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정은 신화 속에서 세계수(기둥)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단군 신화에서 환웅이 강림한 신단수나 북유럽 신화에서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이그드라실이 그 예다.



이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러한 코스모스의 수립이 인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잠시 고대인의 입장이 되어 보자.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하늘 끝까지 뻗어나간 듯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를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 필시 경이로울 것이다. 놀라움의 감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들 이전부터 존재해 온 '카오스와 코스모스를 구분지은 강대한 힘'을 상상하고 이를 따르게 된다.


즉 인간이 행하는 코스모스의 수립은 태초의 창조를 의례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츠키와 메이의 기둥 세우기도 똑같다. 기둥을 세운 뒤 아이들은 녹나무를 바라본다. 녹나무는 그 자체로는 가장 완전한 기둥이면서, 그것을 세운 강대한 힘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근대사회(마을)로부터 벗어난 아이들은 그 힘을, 태초의 창조를 알아볼 수 있다.



3. 물의 이미지 - 정화와 재생의 이미지



이어지는 청소와 목욕 시퀀스는 코스모스 세우기의 연장선 위에 있다. 청소와 목욕을 아우르는 키워드는 물이다. 사츠키네 가족은 청소를 위해 물을 길어 오고, 저녁에는 다 함께 탕에 몸을 담그며 피로를 푼다. 기독교의 세례나 기도를 드릴 때 떠 놓는 정화수(井華水)를 보면 알 수 있듯 신화 속에서 물은 정화와 재생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청소를 통해 집은 물리적으로 정화될 뿐만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정화된다. 집에 깃들어 있던 요괴인 '숯검댕이(まっくろくろすけ)'들이 사라지며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재생된 것이다.


목욕도 마찬가지다. 물로 몸을 씻으면서 사츠키네 가족은 신체적으로 정화되고,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정화된다. 그렇기에 이들은 밤바람에 덜컹대는 집을 보면서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이르러 숯검댕이들은 집을 완전히 떠나며, 인간의 구역이 된 집을 떠나 자연의 구역인 녹나무로 돌아간다. 이로써 사츠키네 가족의 이사는 모두 마무리된다.





그러나 영화는 여전히 복잡한 긴장 관계를 내포한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엄마의 부재'이다. 사츠키와 메이의 엄마는 근처 병원에 입원해 있어 이사에 참여하지 못하는데, 이는 오이디푸스적인 의미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사츠키 가족의 이사를 총지휘하는 것은 아버지, 즉 부성적 권위다. 이로써 사츠키네 가족은 세계에 근대적인 규율을 부여할 수 있지만(Non du père), 세계 자체와 화해하고 이를 이해하는 길은 막히게 된다. 이사가 마무리된 후, 밤바람이 집을 무너뜨릴 듯 흔드는 것은 그래서다. 인간과 자연은 일촉즉발의 긴장 관계에 놓여 있다.


짓궂은 마을 소년 '칸타'와의 대립도 눈여겨볼만하다. 칸타는 사츠키네 집을 '귀신 들린 집'이라고 놀리고, 사츠키는 이에 혀를 내밀며 응수한다. 사츠키네 가족이 가장 처음 만난 마을 사람이 칸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를 여성과 남성의 긴장 구도이자 인간과 사회의 긴장 구도라 파악할 여지는 충분하다.



이처럼 영화의 첫 시퀀스는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 사츠키와 메이가 태초의 신화적 창조를 재현함으로써 코스모스를 수립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는 불안정하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 여성과 남성 등 다층적이고도 긴밀하게 연결된 긴장 관계가 영화를 옭아매고 있다. 영화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과연 사츠키와 메이는 어떻게 이를 헤쳐 나갈까. (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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