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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Jan 31. 2020

〈이웃집 토토로〉와   미르치아 엘리아데③

신화학적 관점에서 본 토토로 이야기, 어쩌면 오이디푸스적인

이웃집 토토로와 신화 분석 : 6~8번째 시퀀스


이전 포스트(https://brunch.co.kr/@doxa/52)를 짧게 요약해 보도록 하자. 메이와 사츠키는 모두 규율의 아노미 상황에서 자연적 질서에 따름으로써 존재적 전환을 이룩하고, 이로써 아노미를 극복해낸다.



이후 이어지는 마지막 세 시퀀스는 메이의 실종을 다룬다. 이들 시퀀스는 어찌 보면 조금 생뚱맞다. 왜 메이가 실종되어야 하고,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해결되는지 영화는 인과적 설명을 내놓지 않는다. 사건은 마치 우연히 시작돼서 우연히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찜찜함을 해결할 실마리는 '공간'이 쥐고 있다. 이전 시퀀스들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은 집(현실과 유리된 관념적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사츠키와 메이의 전환도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배경은 마을이다. 집과 달리 마을은 타인들과 관계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공간이다. 즉, 이전까지의 존재적 전환이 사츠키와 메이의 내적 투쟁이었다면, 해당 사건은 아이들이 사회와 관계하며 벌어지는 외적 투쟁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메이의 실종을 다룬 마지막 세 시퀀스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사츠키와 메이의 분리


바로 전 시퀀스에서 지속 가능한 자연적 삶의 방식으로서 '농경'을 체득한 사츠키와 메이는 이번 시퀀스에서도 이를 유지한 채로 등장한다. 채소를 수확하고 먹는 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평화로워 보인다. 이때 한 가지 눈길을 끄는 점이 있다면 사츠키와 메이의 행동이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한쪽이 옥수수를 따면 다른 한쪽도 옥수수를 따고, 한쪽이 오이를 먹으면 다른 한쪽도 오이를 먹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하나의 자아 같은 동질성을 보여 준다.



이러한 동질성은 칸타의 등장으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한다. 칸타는 병원에서 보낸 전보를 아이들에게 전해주는데, 이때 사츠키는 칸타와 대화를 하지만 메이는 칸타와 대화하지 않는다. 또한 칸타를 따라 전화가 있는 친척집으로 달려갈 때, 사츠키는 끝까지 칸타를 잘 따라가는 반면 메이는 도중에 넘어져 칸타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칸타'라는 인물이 (사실상 유사-가족 구성원이나 다름없는 할머니를 제외한다면) 주인공 자매, 특히 사츠키와 미묘한 긴장 관계에 놓여 있는 유일한 마을 사람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칸타─마을(사회)과의 상호작용이 일어날 때 사츠키와 메이의 동질성엔 균열이 생긴다.


자매간의 균열은 아버지와의 통화를 통해 완전한 분리로 이어진다. '엄마를 만날 수 없다'라는 다분히 오이디푸스적인 규율이 주어졌을 때 사츠키는 이를 수용하는 반면 메이는 수용하지 못한다. 이는 곧 자매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이로써 자매의 동질성은 완전히 와해된다. 이제 자매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 이제 자매는 한 프레임 안에 자리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메이는 실종된다.




2. 메이 찾기 - 부성적 질서의 무능함


메이의 실종을 알아차린 사츠키와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후 사츠키는 메이를 찾아다니며 몇몇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때 사츠키가 만나는 사람들이 누군지 살펴보도록 하자. 사츠키는 가장 먼저 낫을 들고 밭일을 하고 있는 남자 농부를 만나고, 그다음엔 경운기를 타고 있는 남녀를 만나며, 이후 자전거를 타고 온 칸타를 만나 마을로 돌아가게 된다.


이들은 모두 오이디푸스 과정의 면면들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인물들이다. 우선 낫을 든 농부는 그리스 신화 속 크로노스(Cronus)를 연상케 한다. 그는 낫을 든 모습으로 그려지는 남신으로, 아버지를 거세(축출)하여 어머니와 정을 통하고 그 자신 또한 제 아들에 의해 축출된 존재다. '엄마를 만날 수 없다'는 부성적 통제와 그로 인한 존재적 균열 앞에서 사츠키가 가장 처음 마주한 인물이 농부─크로노스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농부는 사츠키의 자아가 마주하는 부친 살해와 에로스적 욕망의 상징이 아닐까? 실제로 사츠키는 농부가 위치한 공간인 언덕 위에 올라가며 아래 세상을 굽어보는 전능한 위치에 오르지 않는가?


이후 사츠키는 경운기를 타고 있는 남녀를 만나게 된다. 상대를 부르는 호칭으로 보아 이들 남녀는 꽤나 친밀한 관계─마치 부부를 연상시키는─라 유추할 수 있다. 이때 경운기 앞으로 뛰쳐나온 사츠키에게 위험하다며 호통을 치는 남자의 모습은 부친 살해와 에로스적 욕망을 가로막는 부성적 권위의 은유로 보인다. 이러한 은유는 프레임 구성에서도 나타나는데, 프레임 속에서 남자는 사츠키와 여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부친 살해의 욕망과 그 좌절이라는 오이디푸스 과정이 끝난 후 사츠키는 연못에서 여아용 신발을 찾았다는 칸타의 전갈을 듣고 마을로 돌아간다. 이는 서사적 맥락에선 사건을 심화시키는 의외의 전환점이지만, 오이디푸스적 맥락에선 아주 자연스러운 진전이다. 인간은 오이디푸스 과정을 마무리함으로써 부성적 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찾아낸 신발이 메이의 것이 아님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는 다시 말해 사츠키가 겪고 있는 존재적 균열이, 현재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부성적 질서에 의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이는 여전히 실종된 채다. 



3. 메이 찾기 - 근대적 인과성을 넘어서


메이의 신발이 아님이 밝혀진 후, 한순간 안심한 사츠키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집으로 뛰어간다. 그리곤 토토로를 만나게 해 달라며 정원의 나무 덤불 속으로 들어가고, 메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무 둥치 속의 토토로를 만난다. 사츠키의 부탁을 들은 토토로는 고양이 버스를 불러 사츠키를 태우곤 메이에게 보낸다. 이로써 사츠키와 메이는 재회하게 된다.


해당 씬은 아주 신비롭고 즐거운 장면이지만, 논리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진 않다. 토토로를 찾아간 사츠키의 행동과 고양이 버스의 주행에는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다. 논리적 우열을 논하자면 토토로보다 마을 사람들의 추리가 훨씬 논리적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수색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토토로와 고양이 버스는 사건을 해결해 준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메이의 실종은, 나아가 사츠키의 존재적 균열은 논리적 설명이나 설득으로 해결될 수 있는 차원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연못에서 찾아낸 여아용 신발을 두고 메이의 것이 아닌지 걱정하며, 기다란 장대를 들고 연못 아래를 수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수색은 '여아가 실종되었다'라는 전제와 '연못에서 여아의 신발이 발견되었다'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연못에 실종된 여아의 흔적(어쩌면 시신)이 있으리라'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인과적 추론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언뜻 합리적인 추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확실한 증거 없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억측이기도 하다. 요컨대 발견된 신발이 메이의 것이라는 추론은 논리적 비약이다. 마을 사람들은 인식으로부터 선행하고 있는 사건을 인과적 추론을 통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듯 하나, 이는 사실 사건을 납득 가능한 형태로 편집하여 이해하는 데 불과하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사회의 작동 원리이면서, 곧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프로세스와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마녀배달부 키키〉와 라캉②https://brunch.co.kr/@doxa/26 참고).



반면 사츠키는 신발이 메이의 것이 아님을 지적하며 논리적 비약을 짚어낸다. 인과론적 인식의 틀로부터 거리를 확보하고 사건을 사건 자체로 파악해내는 것이다. 이는 사츠키가 근대적 질서에 한 발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자연적 질서에 다른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인물이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이러한 사츠키의 태도는 토토로를 찾아갈 때에도 지속되고 있다. 사츠키는 토토로에게 소환, 이용, 계약을 종용하는 대신 다가감, 협력, 요청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웃집'의 거리감으로 말미암아 사츠키는, 스스로 그 자체를 드러내 보이는 자연을 만나고 그 신성한 질서로 회귀할 수 있다. 이에 이르러 메이의 실종은 사실상 해결된다. 그렇기에 사츠키는 고양이 버스를 타고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으며, 고양이 버스는 아무런 물증 없이도 메이를 향해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균열은 봉합되었다.




마치며 : 우리와 우리의 삶의 방식


영화의 결말에서, 재회한 사츠키와 메이는 고양이 버스를 타고 시치코쿠야마병원으로 날아간다. 그곳에서 자매는 아빠와 엄마가 대화하는 모습을 엿보고, 부모님 몰래 선물로 옥수수를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때 자매는 부모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는다. 오직 옥수수만 남겨놓고 갈 뿐이다. 여전히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공고하며, 오이디푸스적 질서는 여전하다. 다시 말해 영화는 근대적 질서의 전복을 꾀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부성적 질서로 직조된 근대 사회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처해 있는 실존적 조건이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자매는 그러한 질서에 순응하지만은 않는다. 옥수수라는 변형된 형태로나마 아이들은 모성과, 자연과, 세계와 소통하는 데 성공한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자아의 단계에선 오이디푸스적 위기를 건전한 콤플렉스의 형태로 승화시키며, 세계의 단계에선 근대 사회 속에서 직면한 한계를 자연적 신성을 상기함으로써 극복해낸다.


이 중 우리가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후자일 것이다.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라는 지구적 위기 앞에서, 혹자는 더 발전된 과학 기술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말한다. 물론 동의한다. 나는 과학기술이 불가능하다거나 비도덕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기술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한 문제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는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고 말하려 한다. 그러한 기술의 밑바닥에 어떠한 정신이 깃들어 있는지 말이다.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당장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면피성 대책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진정한 의미에서 상생하도록 만드는 거시적인 대책이기 때문이다. 이는 툰베리가 지적했던 것처럼 국가 혹은 국제적 차원에서 긴밀하고도 신속한 협의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물론 잊지 말도록 하자. 그러한 협의의 진정한 시작은, 우리 자신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원론적이고도 모범적인 정답을. 자연은 언제나 자연 스스로를 내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 '이웃집'의 거리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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