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배달부 키키〉와 라캉 ①(https://brunch.co.kr/@doxa/25)에서 살펴보았듯, 자아는 '이상적 단일성, 완결성을 표하면서 자아 자신은 아닌, 이미지와의 동일시에 의한 결과'이다. 무질서한 혼돈의 존재인 '주체'는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외부적 시선에 의해 질서 잡힌 '자아'를 만들어낸다. '나'는 이러한 '주체'와 '자아'의 사이를 오가는 존재이다.
이제 주체는 자아를 통해 세계와 교류해야 한다. 인간은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러한 교류의 수단이 되는 것이 바로 언어다. 인간이 언어를 배우고 이를 통해 교류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함축한다. '인간은 언어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인간은 이미 만들어진 언어를 배울 뿐이다.' 어린아이는 자동차를 '뛰뛰빵빵'이라고 부르지만, 점차 자라며 그것을 '자동차'라고 불러야 한다고 교육받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단순히 말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는 이미 이러한 상태로 존재하며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체득하는 과정이다. 이때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이러한 오이디푸스적 과정이 '왜 세계가 그러한 상태로 존재하는지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 과정은 경고와 협박, 회유와 상벌 등의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무의식에 스며든다.
평소 자동차를 '뛰뛰빵빵'이라고 부르던 아이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이제 다 컸으니 '자동차'라고 해야지."라며 야단을 친다. 하루아침에 똑같은 물체의 이름이 '뛰뛰빵빵'에서 '자동차'라고 바뀌는 비합리적인 상황. 아이는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고,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뛰뛰빵빵'을 '자동차'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처럼 우리는 세계가 아무리 비합리적인 모습을 보이더라도 일단 그것을 승인한다.
이처럼 비합리적인 사태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인간은 '나의 외부에 있는 나보다 강력한 것'을 그것의 원인으로 상정하여 지목한다. 만약 다른 어른이 아이에게 "왜 어제부터 '자동차'라고 부르니?"라고 묻는다면, 아이는 "아빠가 그러라고 했어요."라고 답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부否(Non du père)'에 의해, 비합리적인 사태는 마치 합리적인 것처럼 설명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잘 수행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숙'해진 것이다.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안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키키의 어른 되기
우여곡절 끝에 첫 배달을 마무리한 키키의 일은 점점 궤도에 오른다. 그러던 중 키키는 '손녀의 파티에 파이를 배달해 달라'는 노부인의 의뢰를 받게 된다. 직접 부엌일을 돕고, 쏟아지는 폭우를 뚫으면서까지 배달에 열심이던 키키였지만, 정작 파이를 전해 받은 손녀는 "난 이 파이 싫어해요."라며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키키의 첫 배달이었던 생일선물 배달과 이번 파이 배달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중간에 인형을 잃어버려 고양이 지지를 대타로 세우는 등 '사실상 엉터리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이었던 생일선물 배달과 반대로, 파이 배달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이처럼 키키를 둘러싼 세계는, 행동과 그 결과가 합치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사태로 선행한다. 설명되지 않는 세계와 직면한 키키는 장애를 경험한다. 그러나 키키는 결국 그것을 승인한다. "저,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요……?"라며 두려워하면서도, 이튿날 말끔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키키의 모습은 그녀가 결국 선행하는 세계에 적응해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키키는 어른이 되어 간다. 이때 눈여겨보아야 할 인물이 '톰보'다. 톰보는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개구쟁이 소년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그는 단순한 소년이 아니다. 등대를 연상시키는 흰색과 빨간색의 스트라이프 상의와 바다처럼 푸른 청바지를 입은 톰보의 이미지는 키키가 정착한 바닷가 도시의 이미지와 닮아 있다. '비행'이라는 주제로 키키와 톰보가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키키와 세계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키키와 톰보가 가까워질수록, 키키와 지지의 사이는 멀어진다. 키키에게 톰보라는 새로운 짝이 생긴 것처럼, 지지에겐 하얀 암컷 고양이라는 짝이 생긴다. '마녀'라는 '주체' 내부에서 공존하던 키키와 지지가, 이제는 각각 '인간'과 '고양이'라는 다른 상징적 질서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키키와 지지가 '자아'에 기울수록, '주체'로서의 키키와 지지는 흐려지게 된다. 지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며, 비행 능력을 상실해 버린 키키의 모습은 이러한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날지 못하게 된 키키에게 찾아온 것은 숲에 사는 화가(우르슬라)다. 화가는 키키의 옆모습을 그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법이나 그림이나 비슷하구나. 나도 그림을 못 그릴 때가 자주 있어." "정말? 그럴 땐 어떻게 해?" "이쪽 보면 안 돼."
이쪽을 보지 말라는 화가의 말은 표면적으로는 '옆모습을 그리고 있으니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라'는 뜻이지만, 이면적으로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옆을 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키키가 보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통나무집의 벽면이다. 이때 키키는 자신과 타인이 얽혀있는 시선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다. 타인과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내가 타인을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타인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기도 하다(익히 말했듯 '자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화가는 키키를 무한한 거울상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키키가 '주체'로서의 자신을 상기하게끔 만든다.
영화의 결말에서, 톰보는 비행선 밧줄에 매달리는 위험에 처한다. 그런 톰보를 구하기 위해 키키는 마을 사람에게 빌린 대걸레를 타고 무작정 날아오른다. 대걸레를 제어하지 못해 휘청거리는 것도 잠시, 키키는 추락하던 톰보를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키키가 톰보를 구해내는 순간에도 세계는 여전히 비합리적이다. 사람들 사이를 똑같이 위험천만하게 날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통경찰에게 질책을 받았던 처음과 달리 결말에서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다. 그러나 키키는 이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다. 키키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세계에 적응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키키는 마녀로서의 '주체'와 세계의 일원으로서의 '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한 손으로는 대걸레를, 한 손으로는 톰보의 손을 잡고 있는 키키의 모습은 전과 달리 '성숙'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