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 지브리 스튜디오의 명작 애니메이션 <마녀배달부 키키>(1989)가 개봉 3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재개봉했다. <마녀배달부 키키>는 열세 살을 맞은 어린 마녀 '키키'가 도시에서의 삶에 적응하며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의젓하면서 귀여운 소녀 '키키'와 말하는 고양이 '지지', 그리고 항구도시의 아름다운 풍경은 아직까지도 영화를 사랑스럽게 만들어 준다.
영화는 사랑스러울 뿐만 아니라 당대적이다. <마녀배달부 키키>에서 성장이란 '부족한 지점을 자각하고 채워 가는 어떤 과정'이다. 현실에서의 성장은 드라마틱한 파워 업 같은 게 아니다. 오히려 지루하고, 힘들고, 오래 걸리고, 뜻대로 안 되고, 종종 쪽팔리기까지 하다. 그런 의미에서 <마녀배달부 키키>는 여전히 당대적이고, 앞으로도 당대적이리라.
라캉으로 키키 읽기
라캉 철학―정신분석학이 아닌 철학에 주안점을 둔다면―은 <마녀배달부 키키>를 읽어낼 즐거운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라캉 특유의 난해한 체계를 간략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으나, 이 글에서는 <마녀배달부 키키> 독해에 어울리는 단편적인 일부만을 추려내어 요약하도록 한다. 그의 텍스트 전체를 구구절절 옮겨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라캉에 따르면 자아는 '이상적 단일성, 완결성을 표하면서 자아 자신은 아닌, 이미지와의 동일시에 의한 결과'이다.'나의 자아≠나'라는 뜻이다. '나'라는 존재는 본래 무질서하고 혼란하고 스스로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질서 있고 통일되어 있어 알기 쉬운 존재인 '자아'를 만들어 냄으로써 존재론적 혼돈으로부터 벗어난다. 이때 '자아'란, 마치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보는 것처럼, 외부적 시선 및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빚어지는 것이다.
키키는 식물과 약으로 뒤덮인 부모님의 집에서 떠나 수행을 떠난다. 수행을 떠난 마녀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뭔가 특기가 있나요?"라는 동료 마녀의 질문에 키키는 "아뇨, 이것저것 생각해보고는 있지만……."이라며 얼버무린다. 물론 키키에게 아무런 특기가 없을 리 없다. 키키는 자신의 특기를, 나아가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아직 키키는 혼란스러운 존재이다. 사람이 타는 객차가 아닌, 소와 여물이 들어 있는 화물칸에서 편하게 잠을 자는 키키의 모습은 무질서한 존재로서 '키키'를 잘 설명해주는 기호이다.
도시에 도착한 키키는 도심을 날아다니다가 교통사고를 낼 뻔하고, 사람들로부터의 난처한 시선과 경관으로부터의 질책을 받는다. "마녀라도 교통법규는 지켜야 해."라는 경관의 대사는 키키에게, 새로운 세계는 더 이상 존재의 혼란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세계 내에서 살아가기 위해 키키는 스스로를 정의내려야 한다.그러나 키키는 무질서한 존재이므로 스스로를 정의내릴 수 없다.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 키키는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반추한다.
키키는 물건을 잊은 채 빵집을 나선 손님에게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 깜빡한 물건을 전해 준다. 이는 키키가 도시에서 처음 겪은 긍정적 커뮤니케이션이다. 키키는 바로 이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물건을 전해주는 사람'으로 정체화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을 서비스업의 형태로 구상해낼 수 있었던 것은 빵집을 운영하는 오소노 씨 부부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지점에서 키키는 질서 있는 '자아'를 형성한다.
키키를 바라보는 외부적 시선을 통해 키키는 자신을 정체화한다.
그러나 키키는 본래 무질서한 존재이기에, 아무리 스스로를 질서 있는 존재로 정의내린다 하더라도 균열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첫 배달에서 배달품인 고양이 인형을 잃어버린 키키는, 인형으로 위장한 고양이 지지를 수취인의 집에 맡겨둔 채 진짜 인형을 찾으러 동분서주한다.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 없는 지지와 잠시 동안 분리되었던 키키의 첫 배달은 이러한 존재론적 균열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솔직하게 말해 첫 배달은 실패였다. 인형을 잃어버려 지지를 대신 배달하고, 그나마 찾아낸 인형은 망가져 버려서 기워야 했다. 그러나 키키는 이를 밝히지 않는다. 스스로의 균열을 드러내지 않는 자기기만이야말로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과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