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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Feb 14. 2020

기생충 오스카? 솔직히 불쾌하다.

쾌불쾌의 맥락과 탈맥락에 관하여

〈기생충〉이 보편적이라고?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석권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가장 많이 되풀이된 낱말은 아마 '보편적'일 것이다.


"전 세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동아일보)
"기생충은 세계의 보편적인 시대적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영화" (경북일보)
"기생충, 보편적 스토리로 공감 이끌어내" (매일경제)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을 앞다투어 보도하는 언론들은 〈기생충〉의 '무엇이 보편적인지'에 대해서는 저마다의 이유를 갖다 대지만, 정말 그것 때문인지 돌이켜 보진 않는 것 같다. 성찰 없는 감상은 헛되기 마련이다.〈기생충〉이 시대적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는 헛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보편적인 주제는 흔한 주제라는 뜻이다. 보편적인 스토리는 흔해 빠진 스토리라는 뜻이다. 권선징악 같은 주제야말로 보편적인 주제다. 다시 말해 〈기생충〉의 주제나 스토리가 보편적이라는 찬사는, 검토 없이 휘갈긴 텅 빈 문장이거나, 그게 아니면 흔해 빠진 영화라는 뜻의 고도의 엿먹이기다.


히힛 뽀뽀


'〈기생충〉은 보편적이다.'이라는 명제가 여전히 칭찬으로 기능하려면, 문장의 목적어 자리에는 '감정(感情)'이 와야 한다. 감독 스스로가 말하듯 영화 자체는 너무나도 한국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충〉이 보편적일 수 있는 이유는, 영화가 세계의 관객들로 하여금 동일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대단한 영화인 건 그래서다.


요컨대 영화 자체는 특수하나, 영화가 주는 감정은 보편적이다. 그렇다면 〈기생충〉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그것은 불쾌함이다. '기택(송강호 扮)'이 '박 사장(이선균 扮)'을 칼로 찌르는 장면이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유쾌 통쾌하거나 가슴 시리게 감동적일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그것을 본 관객이 불쾌함을 느끼는 순간 비로소 보편적 경험을 산출한다. 〈기생충〉은 보편적으로 불쾌한 영화다.


그렇다면 〈기생충〉은 왜 불쾌할까? 왜 이리도 불쾌한 영화가 극찬을 받는 걸까?





맥락과 탈맥락의 불쾌감


이전 포스트('포식'이 아니라 '기생'일지라도 https://brunch.co.kr/@doxa/39)에서도 짚어 보았듯, 〈기생충〉이 불쾌한 이유는 영화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가 「작품에서 텍스트로」에서  지적하듯, 텍스트는 텍스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텍스트를 둘러싼 수많은 언어적·비언어적 맥락의 조직물로서 존재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텍스트를 수용하고 해석할 때에도 그러한 맥락에 의존하게 된다.


현실의 계급 문제를 논할 때 우리가 의존하는 맥락은 '신자유주의적 맥락'이다. 노동의 다원화가 사실상 계급의 무화를 유발함에 따라 계급투쟁의 구심력을 잃어버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권력은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선망과 숭배의 대상이 된다. 자본력의 아이콘이 된 건물주는 이제 '조물주 위에 선 갓물주'이며, 월 수익 17억 원의 건물주의 하루 일과가 기사화되어 커뮤니티 사이트를 떠돌아다닌다. 기저에 깔린 것은 분노가 아닌 체념이며, 동시에 부러움이다.





그러나 영화(를 비롯한 대중 서사 예술) 속에서 계급 문제를 논할 때는 다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우리는 여전히 '마르크스적 맥락'에 익숙해져 있다. 영화는 여전히 계급투쟁을 선사한다. 〈베테랑〉(2015)에서 황정민이 유아인을 두들겨 팰 때 우리는 환호한다. 황정민은 선한 서민이고 유아인은 악한 재벌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한국 영화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버나움〉에서 가진 것 없는 어린이인 '자인'이  탐욕스럽고 사악한 '아사드'를 칼로 찌르는 순간,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동시에 '자인'의 폭력은 정당화된다. 우리는 자본의 유무가 선과 악을 가르는 것을 보며 만족한다.


하지만 어쩐지 뒷맛이 구리지 않은가?〈베테랑〉은 시원하다. 바로 그게 문제다. 영화가 제공하는 계급투쟁은 아주 오락화되고 의례화된 형태로 가공되어 있다. 영화(정확히는 상업 영화)가 거대 자본의 산물이라는 점까지 지적할 필요도 없다. '사이다 영화'의 과도한 대리만족은 영화 텍스트를 독해하는 마르크스적 맥락이 현실까지 침투하지 않도록 방지한다. 〈베테랑〉을 볼 때, 분노의 화살은 현실의 재벌이 아니라 스크린 속 유아인을 향한다. 권선징악이라는 사필귀정의 논리는 교훈적인 마취다.


사이다 영화의 대표적인 예시, 〈베테랑〉


〈기생충〉은 이러한 지점에서 〈베테랑〉과 구별된다. 〈기생충〉이 조형하는 캐릭터는 극도로 만화적이며 희극적으로 악하다.  신분을 속였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들통날 것을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가족들까지 불러들이는 '기택 가족'의 능청스러운 영악함은,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들에게 친밀감보다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미묘한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이는 비단 기택 가족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박 사장네 가족과 문광 부부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 모든 이들이 그렇다. 영화 속 인물들 중 관객들이 정서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영화는 끊임없이 그것을 방해한다.


요컨대 〈기생충〉은 선함─서민─관객을 잇는 마르크스적 독해를 거부한다. 기존의 맥락이 붕괴된 지점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익숙한 독해법을 자연스레 끌어 오게 된다. 이제 우리는 영화를 신자유주의적 맥락에서 관람한다. 기택 가족과 문광 부부를 규합할 계급의 논리는 무화되었다. 남은 것은 자본과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이다. 벽에 이마를 찧으며 "리스펙"을 외치는 '근세'의 모습은 그래서 서사적인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영화를 신자유주의적으로 독해하기란 여간 생소한 일이 아니다. 인물들의 행동을 납득은 하면서도 어쩐지 불편한 이유는 그래서다. 우리는 여전히 마르크스적 영화 독해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기생충〉을 지배하는 불쾌감은 이러한 간극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달라진 맥락에서 비롯된 존재적 멀미다.


〈기생충〉의 경우엔 통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우리는 보통 이런 이야기를 보려고 영화관에 간다.


〈기생충〉이 흥미로운 영화인 이유는 이 간극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현실과 영화라는 별개의 맥락을 교묘하게 엮어내면서, 〈기생충〉은 서민과 재벌,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 우리 모두를 도발적으로 고발한다. 〈기생충〉은 오락적이지만 마취적인 영화도 아니고, 고발적이지만 노잼인 영화도 아닌, 오락적이면서 고발적인 영화다. 봉준호의 전작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봉준호는 이번에도 '봉준호했다.'

※동시에 그것이 패배주의적 무력감으로 경도될 위험을 내재한다는 점에서도 〈기생충〉은 봉준호의 전작들과 유사하다. "상식을 벗어난 극심한 불평등을 폭로하는 일은, 그것을 바로잡자는 호소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거의 초월적이며 존재론적인 질서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황정아,「불평등의 재현과 리얼리즘」,『창작과 비평』2019년 가을호 23~24면)



오스카 수상 소식이 불쾌한 이유


이처럼 〈기생충〉은 불쾌한 영화다. 영화 내내 도사리고 있는 갈 곳 없는 분노의 아우성에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착한 서민과 악한 재벌은 없고 징그러운 인간들만 가득하다. 그러나 이러한 불쾌함이야말로 〈기생충〉의 성취다. 정확히는 이러한 불쾌감의 폭로가 그것을 극복할 현실적인 동력으로 이어질 때, 그러한 변화야말로 〈기생충〉을 관람한 우리의 성취가 될 수 있다.


'기생충 오스카 수상'에 관한 구글 검색 결과


그러나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을 자축하는 데 바쁜 언론의 행태는 〈기생충〉을 지배하는 '탈맥락의 멀미'로부터 다시 우리를 탈맥락시킨다. 〈기생충〉의 불쾌함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기생충〉의 수상은 국위선양이고 국가적 경사가 되었다. 영화의 불쾌감은 사라지고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았다는 유아적 쾌감만이 가득하다. 영화가 오스카를 수상한 이유가 '보편적인 시대 문제 때문'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시대 문제로부터 영화를 떨어뜨려 놓는다.


〈기생충〉은 좋은 영화다. 그러나 〈기생충〉이 사회의 정전(正傳)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생충〉은 그것을 넘어설 때에야 비로소 위대한 영화이다. 우리는 과연 〈기생충〉을 넘어서려 하고 있는가. 나는 이것이 불쾌하다.


Alternative poster for ‘Parasite’ designed by Andrew Banni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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