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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Oct 25. 2019

'포식'이 아니라 '기생'일지라도

〈기생충〉의 계급 서사가 불편한 이유

    ※ 영화 〈기생충〉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생충〉은 불편하다. 뒷맛이 나쁘다. 시작부터 코미디로 출발해 흥겹고 경쾌한 분위기로 일관하며 '이번엔 아예 블랙코미디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하더니, 중반부의 허를 찌르는 반전을 기점으로 영화는 서스펜스 스릴러로 변모한다. '기택'이 '박 사장'을 찌르고 종적을 감추는 충격적인 클라이맥스에 이어 '기우'의 허무한 독백으로 마무리되기까지, 우리가 가장 진하게 느낀 감정은 '불쾌함'이 아니었을까. 왜 〈기생충〉은 불쾌할까. 단지 꿈도 희망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무언가 탐탁지 않다.



   〈기생충〉이 계급 서사를 담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관객은 없을 것이다.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기택'네 가족과 잘 나가는 IT회사를 경영하는 '박 사장'네 가족의 삶이 얼마나 다른지, 영화는 때로는 웃기게, 때로는 처절하게 보여준다.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낳는 익숙한 대립 구도다. 그러나 〈기생충〉의 계급 서사는 어딘지 모르게 생소하다.


   그 이유는 우선 이들이 웃기기 때문이다. 영화는 피자 박스를 조립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기택 가족의 불우한 생활상을 보여 주면서도, 이를 희극적으로 표현한다. 이에 걸맞게 캐릭터 역시 사실적이라기보다 만화적이다. 집안에 소독차 연기가 들어오자 ‘공짜로 집안 소독이나 하자’며 덤덤하게 구는 기택을 보라! 뿐만 아니라 기택과 식구들은 신분을 속였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들통났을 때를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능청스럽게 행동하며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기생충〉의 희극성은 조금 뒤틀려 있다. 기택네 가족이 보여 주는 코미디는 〈극한직업〉이나 〈엑시트〉에서 볼 수 있는 코미디와 결이 다르다. 요컨대, 〈기생충〉 속 캐릭터들을 조형하는 만화적 연출은 이들에게 친밀감보다는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물론 이는 비단 기택네 가족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박 사장네 가족과 문광 부부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 모든 이들이 그렇다. 특히 문광 부부와 기택네 가족이 뒤엉키며 몸싸움을 벌이는 씬에서 흘러나오는 잔니 모란디의 ‘In ginocchio da te’의 밝고 로맨틱한 선율은 〈기생충〉 특유의 뒤틀린 희극성에 방점을 찍는다.


   이는 기택네 가족의 코미디가 어리숙함보다는 영악함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박 사장네에서 일하던 고용인들을 모함하여 내쫓고 스리슬쩍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는가. 기택네 가족의 '영악함'이 들키지 않고 몸집을 불려 갈수록, 우린 더욱 이들에게 심리적인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의도적으로 관객과 인물을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우리를 인물에게 완전히 이입할 수 없는 존재, 현장에서 한 발짝 떨어진 외부자로 만든다.



   ‘우리’가 ‘외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사실 우리는 외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인이고, 영화는 한국 영화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텍스트를 독해할 때 우리는 사회문화적 맥락(context)에 의존하고, 이는 한국 사회와 문화적 지평을 자양분 삼아 형성된다. 예컨대 〈기생충〉의 앞에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노동자 대 자본가, 나아가 약자 대 강자의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이 가운데 약자가 겪는 소외를 고발하며, 이를 집단적 공감으로 연결시킨다'는 계급적 서사가 〈기생충〉 이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생충〉은 이를 우아하게 걷어차 버린다. 콘텍스트는 힘을 잃고 우리는 관망하는 외부자가 된다. 한바탕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 이질적인 서사구조가 자연스럽게 자리잡는다. 약자와 강자는 대조되지만 대립하지 않는다. 이제 대립하는 것은 약자와 약자다. 영화는 약자들을 규합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에게 칼을 들이밀게 한다. 약자들의 진흙탕 싸움이 처절해지면 처절해질수록 엄습하듯 몰려오는 징그러움은, 익숙하지 않은 대립구도를 맞닥뜨린 데서 연유하는 영화적 멀미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영화관을 나오며 “박 사장네 가족이 제일 불쌍하네.”라고 말하게 된다. 더불어 기택네 가족과 문광 부부의 생활방식을 ‘기생’이라 부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감상은 상당히 많은 미시적 디테일과 거시적 맥락을 편집해버린 결과물이다. 비록 떳떳지 못한 구석이 있긴 하나, 기택네 가족과 문광은 엄연히 주어진 노동을 성실히 수행해낸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기택네 가족과 근세의 빈곤은 (비록 영화가 그 원인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경제 불황과 소득 양극화 등 구조적 문제의 소산이라 볼 여지가 많다.


   하지만 영화는 이 모든 디테일과 맥락을 한바탕 웃음으로 말소시켜 버린다. 그렇기에, 함께 궁지에 몰려 피할 수 없이 벌어진 약자와 약자의 싸움은 동정과 연민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비극이 아니라 징그럽고 불쾌한 잔혹 스릴러가 된다. 맥락이 단절된 스릴러의 종국에서 피해자는 박 사장이다. 박 사장은 그래서 불쌍해 보인다. 강자는 비판의 여지가 있으나 옹호를 받아야 할 피해자가, 약자는 옹호의 여지가 있으나 비판을 받아야 할 가해자가 되었다. 놀랍고 신선하고 불쾌한 역전이 아닐 수 없다.


   〈기생충〉이 불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대의 불가능성이 상호 확인되면서, 약자는 강자에 대항하기보다 다른 약자와 경쟁하기를 택한다. 그나마 승산이 보이기 때문이다. 약자들을 규합할 계급적 논리 자체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 빈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강자의 논리'다. 이제 신자유주의적 약육강식의 논리를 기꺼이 체화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약자들이다. 설령 거기서 자신의 역할이 ‘포식’이 아니라 ‘기생’일지라도! 외부자처럼 물러나 있으면서도, 우리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영화 속에 재현된 ‘우리의 생태’를 알아보게 된다. 영화에 의해 우리는 고발당한다.


   그러나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청신호가 아닐까. 환부의 통증이 신체의 이상을 경고하는 것처럼, 만약 마음이 불편함을 느낀다면 우린 적어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라는 사실 정도는 알아챘다는 뜻이다. 관객의 기대를 멋지게 저버리고 불편함의 극치를 달리는 〈기생충〉의 결말은 그래서 더욱 쓴웃음을 짓게 한다. 마치 기우의 꿈같은 망상, '나 혼자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하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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