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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Nov 01. 2019

잊혀져가는 시대를 비벼서 한 주먹

- 영화 “판소리 복서”가 날리는 귀여운 주먹

여러분은 최근에 판소리를 언제 들어보셨나요? 저는 오래 전 학교 음악시간에 잠깐 졸면서 들어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싱은 어떤가요. 복싱 경기를 언제 마지막으로 보셨나요? 저는 사실 복싱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할 정도입니다. 권투라는 용어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요새는 격투기하면 바로 종합격투기를 떠올리게 되죠. 헐벗은 남정네 둘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몸을 얽으며 거친 숨을 쉬는 팔각형의 링이 떠오릅니다. 판소리와 복싱. 이렇게 잊혀져가는 것 두 가지를 비벼서 만들어낸 영화가 10월에 조용히 개봉했다가 조용히 내려갔습니다. 바로 <판소리 복서>입니다.     


병구(엄태구)와 관장님(김희원)


영화는 모자라 보이는 청년과 그가 관장님이라고 부르는 남자와의 대화로 시작됩니다.      


“관장님, 저 복싱하고 싶어요.”

“그래. 복싱하자. 전단지만 다 돌리고.”     


이제 영화에서 복싱하는 장면이 나오는 걸까요. 아닙니다. 도통 이 영화 복싱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전단지를 다 돌리고 온 청년에게 돌아오는 건 관장(김희원)의 새로운 심부름입니다.     


“그래. 복싱해. 그 피죤만 새로 사오고.”     


 이 모자란 청년 병구(엄태구)는 사실 복싱 유망주였습니다. 한때는요.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인해서 복싱협회에서 영구 제명당하였습니다. 오갈 곳 없는 신세인 병구를 관장님이 거둬서 체육관에서 허드렛일을 하게했죠. 병구는 다시 복싱을 하고 싶지만 막연한 마음뿐입니다. 사실 병구는 펀치 드렁크(Punch Drunk)라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기도 했거든요. 관장님한테 치이고, 병한테 치이고, 관원들인 애들에게 치이는 병구는 그저 무기력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병구가 뿌린 전단지를 손에 쥐고 온 민지(이혜리)가 불새 체육관에 신입 관원으로 등록하게 됩니다. 발랄한 모습으로 체육관의 공기를 데우던 민지는 병구의 열정을 발견합니다.     

민지(이혜리)는 귀엽다.

“저...사실 판소리 복싱했었거든요...”

“그럼 그거 다시 해봐요!”

     

 병구가 앓고 있던 병도, 병구가 복싱협회에서 영구 제명당한 이유도 아무것도 모르는 민지는 대책 없이 말합니다. 병구는 이 대책 없는 응원에 힘입어 무모한 도전을 시작하게 되죠. 자, 이 이후로는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말하겠습니다.


엉거주춤한 판소리 복싱 자세. 영화가 이렇게 다 엉거주춤한 느낌이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촌스럽습니다. 뱉는 대사 하나하나 모두 촌스럽고요. 가끔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굉장히 진지하게 합니다. 서사도 뻔합니다. 큰 반전이 없죠. 영화에서 생기는 갈등은 같은 패턴으로 해결됩니다. 단순합니다. 게다가 아쉬운 인물이 많습니다. 서사에서 끌어가야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방치합니다. ‘어? 얘 분량이 여기서 끝이야?’하는 인물이 너무 많습니다. 화면 구도도 새로운 구도는 없습니다. 프레임 속에 가두기, 사선을 활용한 긴장감 표현 등 이미 있는 구도를 활용한 표현들이고 독창적인 시도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상영 시간도 너무 깁니다. 약 두 시간에 이르는 상영시간은 관객을 지치게 합니다. 특히나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 보내는 두 시간이라 더욱 지치죠. 이렇게나 많은 단점이 있는 영화입니다. 제가 언급하지 않은 단점도 수두룩하게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러분께 이 영화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이 굉장히 어설픕니다. 작중에서 병구가 취하는 엉거주춤한 판소리 복싱 자세만큼이나 어설프죠. 하지만 그 어설프게 푸는 이야기가 참 귀엽습니다. 대사가 어설프고 나사가 빠져있지만 배우가 연기를 진지하게 합니다. 어디서 본 듯한 구도의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지만 참 예쁜 우리나라 시골 풍경입니다. 뻔한 이야기를 뻔하게 풀어나가고, 인물은 어딘가 맥아리가 없지만 인물이 배시시 웃으면 그냥 웃고 넘어가게 됩니다. 이상한 웃음 포인트가 있고 이상하게 몰입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중간 중간 나오는 판소리 내레이션은 생소하지만 흥이 납니다.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링 위에 올라가서 싸우는데 촐싹대며 까부는 음악이 나오지만 이상하게 비벼집니다. 두 시간 동안 앉아 있자니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후들대지만 넋 놓고 보다보면 두 시간이 지나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니까."라는 대사를 표정도 하나 안변하고 진지하게 얘기합니다. 대단하지 않나요?


영화는 시대가 변하면서 잊혀가는 것들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냅니다. 판소리, 복싱, 오래되어 낡은 마을, 필름 카메라 등등...그렇지만 시선을 보내는 일 외에는 별로 하는 건 없습니다. 대안을 내놓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한 번 바라본 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마치 초등학생이 체험학습 한 번 해보고 ‘참 재밌었다.’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 모든 면을 비벼 넣은 이 영화는 참 귀엽습니다. 순수한 영화입니다.     



요새는 매일 화려하고, 진지하고,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는 영화가 개봉합니다. 관객을 쥐고 한순간도 놔주지 않죠. 잠깐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깝습니다. 이런 영화들을 볼 때는 지칩니다. 쉬는 것인지 노동하는 것인지 착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판소리 복서”로 쉬어가는 것은 어떨까요? 참 귀엽고 순수한 영화로 잠깐 쉬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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