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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Apr 03. 2020

<모노노케 히메>   : 근현대 일본 지식인의 자의식

② 숲짐승, 싸움, 그리고 삶

'① 아시타카, 그리고 타타라마을'과 이어지는 포스트입니다.

https://brunch.co.kr/@doxa/61



3. 산, 들개, 그리고 숲짐승들


'모노노케히메(원령공주).' 타타라마을 사람들이 '산'을 부르는 이름이다. '모노노케(物の怪)'란 사람을 홀리거나 괴롭히는 삿된 존재를 일컫는 단어이며, '히메(姫)'란 높은 가문의 딸을 부르는 존칭이다. 이때 '히메'라는 존칭은 '모노노케'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호칭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를 어르고 달래기 위해 쓰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마치 호랑이에게 왕을 부르는 호칭인 '마마'를 붙여 '호환마마'라 부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타타라마을 사람들은 산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은 총포라는 선진기술로 산을 쏴 죽이려 하며, '에보시'는 한술 더 떠서 산과 대등하게 칼싸움을 벌인다.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단검과 이빨을 휘두르는 산의 모습은 괴물이라기보단 하룻강아지 같고, 경외심보다는 처절함과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결국 아시타카는 싸움에 개입해 둘을 제압한 후, 산을 둘러업고 마을을 떠난다.


산과 들개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건 이때부터다. 내내 사나운 짐승으로만 묘사됐던 그들은 마을을 빠져나오고 나서부터 제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캐릭터로 빚어진다. 이에 따라 단순히 한 덩어리처럼 묘사되던 숲짐승들 또한 제각기 다른 사상을 가지고 행동하는 별개 세력들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그중 하나는'산'을 비롯한 '모로 일족'이다. 그들은 커다랗고 흰 들개 신으로, 종종 타타라마을의 행렬을 습격해 짐 나르는 소를 잡아먹는 등 소규모 게릴라전을 벌이곤 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모로 일족은 인간을 물론 증오하지만, 극 중 들개들이 인간을 직접 사냥하거나 잡아먹는 모습은 묘사되지 않는다. 들개들의 어미 '모로' 또한 총에 맞은 후 얌전히 죽음을 기다리는 온건한 모습을 보인다.


한편 '성성이들'은 조금 다르다. 이들은 '숲의 현자'라 불리는 원숭이들로, 인간들이 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새 나무를 심으며 숲을 지키려 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에겐 무력이 없다. 들개 한 마리의 위협에 수십 마리의 성성이들이 혼비백산하며 달아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들의 투쟁은 큰 효과를 이룩하지 못한 채 좌절되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하여 성성이들은 아시타카를 잡아먹고 인간의 힘을 얻어 인간을 몰아내자 말한다. 여전히 무력은 없어 공상에 머물 뿐이지만.


성성이들(좌), 옷코토누시(우)


한편 숲에는 '옷코토누시'를 비롯한 '멧돼지 일족'도 있다. 그들은 숲짐승들 중 가장 급진적인 짐승들로, 모로 일족과 의견 충돌을 빚는다. 또한 소규모 게릴라전을 일삼는 모로 일족과 달리, 멧돼지들은 옷코토누시의 지휘 아래 인간들과 한바탕 전면전을 계획한다.


이들 숲짐승에겐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인간에게 적대적이며, 또한 기본적으로 '시시가미'를 우러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에게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제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고 있다. 모로 일족은 소규모 게릴라전, 성성이들은 요인 살해, 멧돼지들은 전면전을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시시가미의 뜻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제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고 있다. 모로 일족은 시시가미의 뜻이 어떻든 그에 순응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성성이들은 시시가미가 숲을 버렸다며 원망하고, 멧돼지들은 전면전을 통해 인간을 몰아내는 것이야말로 시시가미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 주장한다.


전공투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나리타 스토리 : 이카루스의 추락〉 中


비슷한 의식과 이상향을 두고 각기 다른 노선을 택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1960년대 후반 일본 좌익 학생운동 연합체인 '전학공투회의(全学共闘会議, 전공투)'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당시 유럽과 영미권을 중심으로 촉발된 68운동의 국제적 흐름은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쳐, 일본 대학가에서도 새로운 흐름의 반체제·반문화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전공투다.


이들의 특징은 전체 조직을 총괄하는 중추세력 없이 대학별, 사상별 운동조직의 수평적인 연합체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수직적 위계질서가 강했던 196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조직과 전공투를 가르는 큰 차이점이다. 이는 기성 정당과의 상명하복에 지쳐 있던 당시 학생운동가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전공투를 통해 자율적이고 평등한 투쟁이 가능하리라 믿었고,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곧 전공투의 약점이 되었다. '수평적 연합체'인 탓에 조직 간 의견 차이를 중재할 중추세력이 없어 파벌 간 갈등이 극단화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사실상의 테러 및 강력범죄를 저지를 정도로 무력을 행사한 세력도 있었다. 그리하여 전공투는 점차 중도층 학생과 대중의 지지를 잃어 갔고, 결국 와해되어 버렸다. 죽거나 사라져 버린 숲짐승들처럼 말이다.



마을을 떠난 아시타카는 이들과 함께 생활한다. 아시타카는 산의 보살핌을 받고, 시시가미에게 상처를 치유받을 뿐만 아니라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외부인이다. 보다 정확히는, (마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가 숲의 질서를 거부한다. 에보시가 그러했듯 산 역시 여성의 신체로 기호화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남성주체인 아시타카는 마을의 질서뿐만 아니라 숲의 질서 또한 대상화한다. 그는, 아시타카─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런 중간자의 입장에 있다. 마을이라는 군국적이고 우익적인 세계와 숲이라는 투쟁적이고 좌익적인 세계 중 그 어느 것도 내면화하지 못하는 길 잃은 아이처럼 말이다. 이러니 그가 만화영화를 업으로 삼게 된 것이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글쎄, 그건 조금 과장일까.





4. 전쟁과 재앙, 그리고 저주


옷코토누시와 멧돼지들은 이내 인간과 전쟁을 벌인다. 아시타카가 그토록 부르짖던 숲과 인간의 공존 대신 싸움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압도적인 무력 차이에 의해 멧돼지들은 패퇴하게 되고, 옷코토누시는 다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시시가미를 찾아간다. 그러나 옷코토누시는 맹목적인 집념을 이기지 못해 재앙신으로 변하게 되고, 어느새 나타난 시시가미는 그런 옷코토누시의 생명을 거두어 간다.



이 시퀀스에 이르러, 극의 모든 사건을 낳고 아시타카를 괴롭혀 온 '저주'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한다. 꿈틀대는 검은 촉수로 표현되는 그것은 처음엔 아시타카의 생명을 앗아가는 저주이자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힘이었다. 그러나 점차 아시타카는 그것을 '내 속에 깃든 증오와 원한'이라 말하고, 모로는 '죽음이라는 순리를 거스르려 한 결과'라 말한다. 이전까지 '저주'가 인간에 의해 자초된 재앙처럼 묘사되었다면, 시퀀스를 거듭하면서 그것이 마치 옷코토누시와 멧돼지들의 그릇된 집념에 의해 발생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극의 전반부에서 '저주'란 일본 지식인을 덮친 제국주의적 근대화의 세례─그 빛과 그림자─에 불과했다면,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는 좌우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여 싸움과 증오의 연쇄를 낳는 무언가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타타리'가 아시타카와 산, 에보시를 모두 뒤덮고 있다.


극 중에서 이를 일컫는 단어는 '祟り(타타리)'로, 이는 '지은 죄의 앙갚음으로 받는 재난'을 뜻한다. 이 단어를 통해 아시타카─미야자키 하야오는 되풀이되는 싸움과 증오가 '앙갚음' 때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인간이 숲짐승을, 숲짐승이 인간을, 다시 인간이 숲짐승을 해하는 앙갚음의 굴레에서, 이제 아시타카는 그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 한다.





5. 시시가미 죽이기



시시가미가 옷코토누시와 모로의 생명을 거두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에보시는 이내 총으로 시시가미를 쏘고, '지코 스님'은 잘린 머리를 든 채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시가미는 죽지 않았고, 오히려 거대한 거인의 모습(데이다라봇치)으로 변해 자신의 머리를 찾으며 몸에 닿는 모든 존재의 생명을 앗아가게 된다.


시시가미의 모호한 캐릭터성을 한 단어로 요약하기란 어불성설이겠으나, 지금까지의 해석을 토대로 극 중에 나타난 모습을 살펴보자면, 시시가미는 앙갚음의 저주(타타리)를 종식시키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옷코토누시의 원한을 잠재우고 안식을 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에보시는 이를 거부한다. 총신에서 나뭇가지가 자라나게 만드는 시시가미의 권능과 그 오묘한 눈빛을 마주하고도 에보시는 시시가미를 죽이기 위해 총을 쏜다. 진정한 재앙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그로부터다.



천지를 뒤덮는 데이다라봇치의 모습은 원자폭탄으로 인해 생긴 버섯구름의 노골적인 은유로 보기 충분하다. 이는 전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애니메이션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전유하는 유서 깊은 기호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에게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는 망국에 비견될 정도로 큰 피해를 준 사건으로, 이로써 당시 일본 사회는 진영과 계급을 가릴 것 없이 커다란 충격과 회의에 휩싸이게 되었다. 안보투쟁과 전공투 등 전후 반전 및 반체제 운동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음은 달리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모노노케 히메〉의 개봉 연도가 1997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종전으로부터 50년도 더 지난 1997년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다시금 원폭의 이미지를 꺼내 든 것은 어째서일까. 나는 그것이 90년대 일본 사회 전반에 걸친 침체적 분위기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80년대 호황을 누렸던 일본 경제는 90년대 부동산·주식 폭락을 겪으며 급격한 하락세를 맞는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장기불황은 세기말이라는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여러 사회 혼란을 야기했는데, 옴진리교 사린가스 테러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일본 6대 도시의 상업용 지가 지수. 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폭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요컨대 일본의 1990년대는 어떤 형태로든 개혁과 발전의 가능성을 추구할 수 있었던 60~80년대와 달리 불안과 절망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에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단절되기 마련이고, 반목하기도 다반사다. 실제로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풍 또한 90년대로 들어섬과 동시에 점차 시니컬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다. 주인공 이카리 신지가 "그러니까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라고 되뇌는 〈에반게리온〉 시리즈가 인기 애니메이션으로 떠오른 것도 이 시기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로 여기서 원폭의 이미지를 본 게 아닐까. 극심한 충격과 그로 인한 불안, 회의감이 만연한 사회. 그 속에서 갈 곳 잃고 소용돌이치는 분노와 절망. 이대로 가면 또다시 원폭 같은 재앙이 닥쳐오리라는 위기의식.


그런 데이다라봇치의 물컹거리는 손아귀 한가운데서 아시타카와 산은 선택한 길은 시시가미의 머리를 돌려주는 것이다. 아시타카와 산은 데이다라봇치를 피해 달아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한다. 시시가미의 머리를 높이 든 채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데이다라봇치의 몸뚱이를 그대로 맞는다. 그들 몸에 새겨진 저주가, 그 원한과 분노가 온몸을 뒤덮게 되더라도 그들은 우뚝 선 채 세상을 뒤엎은 증오의 연쇄를 스스로의 결정으로 끊어낸다. 그리하여, 소년소녀의 사랑이 세계를 구한다는 세카이계(世界系)적 상상력과 함께, 이들의 세계는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재생한다.



이러한 아시타카와 산의 태도를 여실히 말해주는 단어가 바로 영화 포스터의 헤드 카피이기도 한 "살아라(いきろ)"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살아가는 것. 분노나 증오가 사무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죽거나 죽이지 않고 함께 살아가몸짓. 한쪽은 마을에, 다른 한쪽은 숲에 남더라도 여전히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아시타카-미야자키 하야오가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 끝에 찾아낸 것은 바로 그러한 '삶'이 아니었을까.






맺음에 부쳐 -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한계


이로써 〈모노노케 히메〉는 인간과 숲과 태곳적 신들에 얽힌 장대한 서사를 마무리짓게 된다. 그러나 〈모노노케 히메〉는, 깊은 신화적·역사적·사회적 통찰 및 그 표현의 장엄함과 유려함을 감안하고서라도, 어쩐지 아쉬움을 남긴다. 요컨대 영화는 명확한 한계를 지닌다. 그리고 그 한계의 원인은 영화의 감독이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점에 있다. 영화가 가진 위대함의 원인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宮崎 駿(Hayao Miyazaki, 1941~)


이전 포스트에서 짚고 넘어간 것처럼, 미야자키 하야오는 군수공장주 집안에서 태어나 가쿠슈인에서 수학한 부르주아 출신이다. 제아무리 그가 안보투쟁을 비롯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하더라도, 노동계급 출신과 부르주아 출신이 바라보는 투쟁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멧돼지와 인간의 전쟁이 단순한 증오의 싸움으로 비춰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결코 빈자가 되어보지 못한 그이기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쉽게 싸움을 멈추라고 말할 수 있다. 투쟁을 논하는 자들이 어째서 투쟁을 논하는지를, 어째서 누군가에겐 그것이 혁명일 수 있는지를, 미야자키 하야오는 결코 온전하게 느낄 수 없었으리라.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인이다. 그는 근대화를 '힘'이라 말할 수 있는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이었다. 물론 그가 열렬한 평화주의자인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가 아시타카에게 깃든 저주를 외부로부터 부여받은 저주이자 강력한 힘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근대화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경험한 나라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근대화의 빛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일본 스스로의 식민지배와 수탈에 의해 이룩된 것임을, 누군가는 오로지 근대화의 어둠을 떠맡아야 했음을, 한국인인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 좌) / '살아라'(〈모노노케 히메〉(1997), 우)


마지막으로, 영화의 개봉 연도인 1997년에 이르러 그는 이미 56세였다. 버블 경제의 호황에 힘입어 여러 작품의 흥행을 성공시키고, 지브리 스튜디오를 궤도에 올려놓은 '성공한 기성세대'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의 시대를 맞이하고서도 깔끔담백하게 "살아라."라고 말할 수 있다('살자'가 아니라!). 실제로 그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 본격적으로 촉발된 '오타쿠 현상'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어째서 젊은이들이 만성화된 분노를 자기폐쇄적 회로 안에 가둬놓은 채 말초적 쾌락을 무력하게 탐닉하는지 그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종합하면,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사상과 삶과 매력과 한계와 위대함과 편협함이 한데 모인, 그야말로 미야자키 하야오스러운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영화는 절대 한 단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긴장과 흐름을 내재하고 있다.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인간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앞서 열거한 수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모노노케 히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의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너무나도 미묘하고 장엄하기 때문에.






 나는, 〈모노노케 히메〉를 인간불신을 조장하려는 영화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좋은 존재'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 속에는 어리석음도 있으며 지혜로움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私は、『もののけ姫』を、人間不信を助長するような映画にはしたくなかったんです。かといって、人間はいいものだという視点も捨てました。一人の人間の中には愚かさもあれば賢さもある。
それが人間なん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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