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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호 Sep 29. 2020

그래서 이 세계는 누가 지킨다고?① <보건교사 안은영>

[오늘 밤엔 넷플릭스-9월 5주]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리뷰

안은영(정유미)이 처음 시청자에게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 있다. 1화 초반, 자신이 남들과 다른 사람임을 밝힐 때, 은영은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씨발." 은영이 자신의 특출난 운명을 갈무리하는 화법은 싱겁기 그지없다. 이처럼 은영은 자신의 특별한 능력(젤리와 원귀를 볼 수 있고 그것들을 물리칠 수 있다)을 그다지 긍정하지도 그렇다고 격하게 부정하지도 않는다. 학교 보건 교사가 학생들의 아픔을 그때그때 돌보듯이 드라마 초반 은영은 목련고를 엄습하는 불운의 젤리를 그때그때 처리할 뿐이다. 이럴 때마다 은영의 눈에 서린 정념은 숭고한 감정들과는 거리가 멀다. 은영에게 '지구를 구하겠다는 사명감'과 '초능력으로 인류를 지키겠다는 소명의식'을 기대하면 안 된다. 오히려 그녀는 젤리를 없애려다 불쑥 역정을 내거나(2화) 힘에 겨워 잠시 도망가기도 한다(6화).


다시 은영의 첫 소개 내레이션(“나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씨발.")이 입혀진 씬을 상기해보자. 어린 은영이 어디론가 뛴다. 어린 은영은 방금 부모의 이혼, 친모와 영원한 헤어짐을 경험했다. 이때 은영의 뜀박질은 도망이다.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오는 부담감, 부모의 이혼에서 기인한 혼란, 친모와 이별에서 배태된 비감이 어린 은영을 덮친다. 이에 어린 은영은 도피처를 모르지만 일단 도망친다. 그리고 화면 전환,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번에는 성인 은영이 뛰고 있다. (과장 조금 보태) 악다구니를 애써 누르며 달리는 은영의 행선지는 명확하다. 성인 은영은 그녀의 직장이자 젤리가 드글한 곳인 목련고등학교를 향해 달리고 있다. 성인 은영은 어린 은영과 달리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다(물론, 지각 안 하려고 뛰는 중이기도 하다).

은영의 삶은 현실의 씨실과 판타지의 날실로 직조한 한 겹의 레이어에 비유할 수 있다.


드라마 전체(시즌1) 비추어봤을  은영의 교문 뜀박질은  가지 의미로 해석할  있다. 하나는 지각을 면하기 위한 직장인의 처절한 생존형 몸부림. 다른 하나는 자신이 맡은 세계를 지키러 가는 영웅의 출동.   주인공 은영의 움직임은 대부분  부류  하나에 속한다. 그런데  드라마의  특징은  성격의 움직임을 애써 박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클라크 켄트-슈퍼맨, 브루스 웨인-배트맨 같이 신분의 간극을 넘나들며 에피소드를 만드는 스테레오 타입의 히어로와는 다르다. 은영의 삶은 교사(직장인)로서 현실의 씨실과 퇴마사로서 판타지의 날실로 직조 겹의 레이어에 비유할  있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구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드라마는 은영에게만 보이는 "  겹의 세상" 항상 현실과 버무린다. 그렇게 혼재되고 중첩된 현실과 판타지를 은영은 전부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운명과 일상을 무던히 수용하며 맡은  일을 해내는 은영. 은영의  등장이 목련고를 향한 뜀박질인 이유는 그녀가 가끔은 지각도   아는 평범한 직장인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녀가 위험의 근원(목련고) 찾아 나서는 영웅임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하루는 은영이 보건실에서 지형의 외상을 소독한다(3). 다른  같은 장소에서 은영은 지형 위에 기생하는 젤리를 없앤다(4).  화를 건너 이어지는  장면에서 은영은 자신이   있고, 또 마땅히 해야  일을 차분히 수행한다. <보건교사 안은영>  같은 연결의 영웅 서사를 지향한다.  드라마는 이웃으로부터 단절과 일상을 탈피한 장엄함을 수반하는 영웅화/신격화를 원하지 않는다. 대신, 일상에서 각자의 본분으로 세상을 지탱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그리고  조명과 스토리텔링의 방식은 유쾌하고도 섬세하며 세련되었다.




감독: 이경미

출연: 정유미, 남주혁, 유태오, 문소리 등

장르: 판타지, 코미디

시청가능플랫폼: 넷플릭스

원작: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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