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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호 Oct 08. 2020

어떤 삶은 추방에서 시작된다 <스틸 라이프>

[영화는 왓챠지-10월 1주] 영화 <스틸 라이프> 리뷰

어떤 삶은 추방에서 시작된다. 공동체로부터 배척은 곧 유랑하는 삶 혹은 침잠하는 삶의 시단이 되기도 한다. 공동체 내 비주류로 배제받아온 집단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유럽 사회는 2010년대 들어 대륙 바깥에서 도래한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기 시작한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동시대 유럽은 탁월한 감각으로 국경 안 타자를 재현하는 영화들을 배출한다. <렛 미 인>(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과 <경계선>(알리 아바시, 2018)은 설화적 모티프를 차용해 정착하지 못하는 소수자의 일생을 판타지로 빚어낸다.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은 <트랜짓>(2018)에서 유럽 난민의 유랑을 대체 역사물로 승화하는 담대함을 선보인다. 켄 로치 감독 최근 작들(<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미안해요, 리키>(2019))은 익히 알다시피 보다 직접적인 화법으로 복지 사각지대의 계층을 조명한다. 전술한 영화들의 공통점은 파국으로 치닫는 서사 전개나 핸드 헬드 촬영 기법으로 인해 모종의 불안감이 배어 나온다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가 나 혹은 우리의 것이 아닌 공동체 바깥 타자의 삶을 그릴 때 영화에 불안함이 깃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스크린에 담긴 삶이 추방에서 시작되었으니까.


<스틸 라이프>(우베르토 파솔리니, 2014) 역시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는 삶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의 주인공 존 메이(에디 마산)는 런던 케닝턴 주민센터 소속 공무원이다. 관할 지역에서 발생한 고독사 처리가 그의 주된 업무다. 존은 사무실에서 무연고 사망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고인의 생전 친지들에게 비보를 전한다. 고인의 장례를 준비하고 집행하는 것 또한 존의 몫이다. 그는 꼼꼼히 추도사를 작성하고 사려 깊게 장례 방식을 택한다. 설령 고인의 장례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는다. 존은 장례식에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여로를 배웅한다. 존은 쓸쓸히 살다가 외로이 생을 마감한 이들의 장례에 이토록 열심이다. 존 역시 사망자들처럼 타인과 깊숙한 관계가 없지만 한 곳에 소속되어 성실하게 일상을 유지하는 지속성이 그의 삶에 중심을 단단히 부여잡는다.


그런 존의 지속성이 한순간에 단절된다. 존의 상사 프래챗 부장은 조직 개편 사실을 알리며 존에게 해고를 통보한다. 존은 이제 조직에서 공식적으로 퇴장해야 한다. 20년 넘게 국가를 대리해 죽음을 관리한 존에게 조직은 "새 출발"이라는 예쁜 이름의 추방을 명령한다. "살아있는 사람들과 일해"보라는 부장의 한건한 위로를 더욱 무색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주변에 "살아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타인과 긴밀한 연결이 전무한 그에게 실업은 유일한 사회 연고를 지우는 작업이다. 존은 공동체와 자신을 잇던 한 가닥의 네트워크를 상실할 예정이다.


추방 선고과 함께 존의 삶은 안정에서 방황으로 변모한다. 사무실에서, 사고 현장에서, 장례식장에서 언제나 차분하던 그가 해고 통보를 기점으로 떠돌기 시작한다. 해고 유예기간 3일 동안 존은 기차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유난스러울 만큼 마지막 사망자(극 중 이름 빌리 스토크)의 친지를 찾는다. 그가 직접 만난 친지들은 고인의 사망 소식에 시큰둥하다. 존이 장례 참석을 권해도 반응은 하나같이 거절이다. 망자의 삶을 추적하던 존은 공동체에서 벗어난 타자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깨닫는다. 그런 존에게 걱정이 덕지덕지 붙는다. 대사로 표현되지 않는 그의 염려는 자신의 적막한 운명을 예고한 것이리라. 가슴 저미는 사실은 공동체로부터 추방을 앞둔 그에게도 타자가 감내해야 할 고독이 엄습한다는 것이다.


망자의 삶을 추적하던 존은 공동체에서 벗어난 타자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깨닫는다.


사흘 동안 존의 몸은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그동안 그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여정을 마친 그는 애써 초연하게 자세를 다듬으며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 새로운 다짐이 무엇일지 관객은 아직 모르는 시점에서 영화는 결말을 맞이한다. 공동체에 편입하지 못한 삶이 곧 유령처럼 떠도는 삶이라면 <스틸 라이프>의 결말은 스크린 바깥 존 메이의 새로운 삶을 빗댄 은유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존과 수많은 방랑객이 상봉하는 라스트씬은 방랑하는 타자들에게 영화가 건네는 소소한 위로가 아닐까.

2013년 베니스 영화제 오리종티 감독상 수상작




감독: 우베르토 파솔리니

출연: 에디 마산, 조앤 프로갓 등

장르: 드라마

수상: 70회(2013) 베니스 국제영화제 오리종티 감독상

시청가능플랫폼: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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