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호 Oct 25. 2020

여름방학과 종이책, 첫사랑의 안온감 <귀를 기울이면>

[오늘 밤엔 넷플릭스-10월4주] 영화 <귀를 기울이면> 리뷰


사랑에 젖어  자만이 소설을   있다. 글로 새로운 세상을  내려가는 작업은 누군가를 사랑했을  배어 나오는 몸짓과 닮았다. 나의 내면을 조금씩 도려내어 타인에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말이다. 재난문자 진동처럼 떨리는 손마디와 한여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눈빛이 사랑을 들통나게 하듯이 행간에 쌓인 감정의 폭과 인물에 스며든 고민의 흔적을 통해 우리는 저자의 내면을 더듬을  있다. 육신 바깥으로 튀어나온 내면에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도 사랑과 소설 쓰기의 공통점일 테다. 연모의 감정을 수습하거나 불어나는 마음을 다루는  애를 먹는 것처럼 지면  내놓아진 글귀의 행로에 괴로워하는 것은 저자의 숙명이다. 사랑을 순순히 인정하는 과정이 감정의 그릇의 모양을 확인하는 단계라면,  문장  문장 작문은 마음속 은하수를 여행하는 과정일 테다.  


츠키시마 시즈쿠는 소설을 좋아한다. 중학생 시즈쿠는 빛 좋은 여름을 만끽하고 있다. 방학을 맞아 나무 그늘 밑 벤치에서, 도서관에서, 집에서 책 읽기에 즐거워하는 중이다. 그런 그녀에게 매번 같은 이름이 눈에 차인다. 시즈쿠는 아마사와 세이지라는 이름의 남성이 궁금하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빌리는 책마다 (대출 이력을 수기로 적는)도서 카드에 아마사와 세이지 이름을 발견한다. 시즈쿠는 자신과 같은 취향을 가진 이 사람이 궁금하다. 취향의 접점은 곧잘 사랑의 계기가 되고는 한다. 시즈쿠는 세이지라는 사람의 나이, 직업, 기타 자잘한 정보 하나 없이 그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극 중 시즈쿠가 직접 인정하는 장면은 없었지만, 처음으로 시즈쿠가 재수 없는 자전거 라이더 소년이 세이지임을 알았을 때 토로한 실망은 그만큼 기대감이 컸음을 반증한다. 그렇다고 시즈쿠가 세이지라는 인물에게 가지고 있던 연모가 일순간에 휘발되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자전거 재수탱이의 첫인상은 낙제였지만 세이지는 여전히 시즈쿠와 같은 취향을 공유한다.


시즈쿠의 사랑은 실제 15살의 그것답다. 시즈쿠가 하는 사랑은 어설프고 풋내가 난다. 친구 하라다 유코에게 연애 박사 학위자마냥 큐피드 역할을 자처했건만 정작 자신은 세이지 앞에서 서툴게만 행동한다. 그래서 시즈쿠가 하는 사랑은 그녀의 첫 번째 소설과 유사하다. 시즈쿠의 첫사랑과 첫 소설은 매끈하지 못하고 미완성에 가깝다. 각근의 노력을 다해도 첫 소설은 아쉬울 수밖에 없고 그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첫사랑도 마찬가지여서 알게 모르게 튀어나간 내 감정을 인지하고 책임지는 데 능숙하지 않다. 익숙지 않은 경험을 겪으며 시즈쿠는 스스로의 형상을 한 움큼씩 조소(彫塑)한다. <귀를 기울이면>은 그렇게 관계를 통해, 글쓰기와 문학을 통해 자신을 빚는 소년의 성장담이다.


여름방학과 종이책, 첫사랑이 주는 안온감은 구태여 후일담을 붙이지 않은 미완으로 충분하다.


수기식 도서카드가 바코드로 전환되려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변환점에 시즈쿠와 세이지가 살고 있다. 손 글씨를 따라 사랑이 잇닿는 아날로그틱한 설정은 정교하지 못하고 시간을 들여 감지하는 첫사랑의 추억과 어우러진다.(이러한 환경을 이용해 시즈쿠의 호감을 얻어 낸 세이지의 지모가 얄밉도록 뛰어나다.) <귀를 기울이면>은 스튜디오 지브리 특유의 희망찬 결말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다만 섣불리 먼 미래를 점치지 않는다. 사실 정말 둘이 결혼하는지, 시즈쿠는 앞으로도 소설을 쓰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이 애니메이션은 소년성과 첫사랑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니까. 여름방학과 종이책, 첫사랑이 주는 안온감은 구태여 후일담을 붙이지 않은 미완으로 충분하다.




감독: 콘도 요시후미

시청가능플랫폼: 넷플릭스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서 이 세계는 누가 지킨다고?② <보건교사 안은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