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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호 Feb 28. 2021

<윤희에게> 보셨어요?

[오늘 밤엔 넷플릭스-2월 4주] 영화 <윤희에게> 리뷰

<윤희에게>(임대형, 2019)는 매 겨울마다 두고 보기 부족함 없을 영화다. 이 영화에는 배경이 선사하는 미감과 서사에서 파생하는 감응이 고루 깃들어있다. '윤희(김희애)가 잿빛 일상을 벗어나 새하얀 설원을 경유해 고명도의 삶으로 내딛는', 어떻게 보면 단순한 구조의 여행기이지만 <윤희에게>는 촬영배경의 아름다움과 멜로드라마의 감동이 수차례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이렇듯 <윤희에게>는 만듦새부터 후한 평가를 받는 영화이지만 그것이 이 영화가 두터운 호응을 받는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윤희에게> 속 사랑은 이성애 주류 사회 속에서 레즈비언 커플의 비극에 가까운 운명론적 로맨스이지만 극 중 인물 윤희 개인에 초점을 맞춘다면 사랑은 자기복원의 희망을 응원하는 트리거로 작용한다. 연인 관계의 사랑이건만 사회구조적 외력이 윤희-준(나카무라 유코) 인연을 갈라놓는다. 이후 윤희의 자기정체성은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20년 넘는) 오랜 세월 방치된다. 준과의 이별 이후 맞닥뜨린 회환의 삶을 윤희는 "벌"로 여긴다. 하지만 윤희는 스스로 "벌"이라 칭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누구에게 어떤 죄악을 저질렀기에 앙화를 짊어졌는지 말하지 못한다. 윤희는 스스로를 향한 깊은 성찰과 긍정 대신 '안 된다'는 대타자적 관점으로 본인을 부정한다.


만일 영화가 '준과의 재회' 하나만을 맹목적으로 쫓고 그것이 윤희를 구원할 유일한 방도인양 다루었다면 <윤희에게>는 수천 년 동안 재생산된 안드로규노스 이야기 답습에 그쳤을 테다. 다시 말해 신데렐라나 온달처럼 운명적 만남과 사랑으로 구원받는 이야기 말이다. 물론 그랬다면 <윤희에게>를 향한 평단과 관객들의 지지가 지금 같지 않았을 것이다. <윤희에게>는 멜로드라마의 외형을 얼추 빌리면서도 메시아의 역할을 다른 사건 혹은 사람이 아닌 윤희에게 쥐어준다. 윤희는 새봄(김소혜)이 집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오타루 여행을 종용했을 때부터 낌새를 눈치챈다. 준과 마주칠 수도 있다는 희망과 자신을 옭아매는 현실 여건 사이에서 주저하면서도 끝내 용기를 낸다. 새봄 커플과 마사코(키노 하나)의 도움이 순풍이라면 윤희의 의지는 돛을 피고 노를 젓는 것과 같다. 이 여행기의 주체는 누가 보더라도 윤희다. 윤희는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갑작스럽지 않은 단계를 거쳐 준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윤희는 파괴된 그의 정체성을 수습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또한 <윤희에게>는 뜬금없는 자기긍정을 억지로 주입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몇 년 전부터 로맨스 장르에서 운명론적 사랑이야기 클리셰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가 많았다. 이러한 부류는 '평생의 반쪽을 찾아 결혼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하는 뻔한 이성애·가족주의 담론을 회피한다.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은 그토록 찾던 사랑의 묘약 대신 자기긍정의 이로움을 깨닫는다.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수잔 존슨, 2018)와 <어쩌다 로맨스>(토드 스트라우스-슐슨, 2019)의 결말이 이런 방향이다. 문제는 자존감과 자기긍정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이 급작스럽게 등장하고 이전 서사와의 개연성에 들어맞지 않을 때 발생한다. 메시지 전달에 치중하다가 개연성 수립에 실패해 영화의 감흥을 갉아먹는다.


반면 <윤희에게>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2시간도 안 되는 러닝타임 내 숏을 성실히 활용한다. 차분히 쌓아 올린 윤희의 결단은 결말에 이르러 이성애 유일론 신화를 무너뜨리고 사랑의 효능과 자기복원의 희망을 확인하는 메시지를 온건하게 전한다. <윤희에게>는 삭월이 만월로 채워지는 시간을 가만히 헤아리는 여유를 닮았다. 영화는 자기복원의 서사를 꾀하면서도 과장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막연한 기다림이 아닌 차분한 의지의 발현 끝에 윤희가 새로운 봄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첫머리 사이에서 <윤희에게>를 소고한다.




감독: 임대형

출연: 김희애, 나카무라 유코, 김소혜 등

장르: 퀴어, 멜로, 여행

수상: 41회 청룡영화상(2021) 감독상 각본상, 4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2020) 각본상 등

이용가능플랫폼: 넷플릭스,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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