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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호 Nov 22. 2020

음악이 울리고 주성치가 등장했다

[영화는 왓챠지-11월 4주] <서유기 월광보합>, <쿵푸허슬> 리뷰


이제는 그가 나와야 할 때. 심상치 않은 배경음이 내리면 언제나 기대감이 부푼다. 어린 시절 <이누야샤> 속 일본색 짙은 현악은 셋쇼마루의 기품 있는 등장을 예고했다. 인조인간 16호가 처참히 부서지고 삽입된 魂vs魂는 고대했던 손오반의 각성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가꾸었다.(<드래곤볼 Z>) 액션 애니메이션의 비장미에 가슴 설레던 소년은 성인이 되어 이제 매끈한 영화적 도래에 열광한다. 터널을 비추는 빛의 점멸을 통해 자경단의 복귀를 알린 <다크 나이트 라이즈>(크리스토퍼 놀란, 2012). "수양대군 납시오"라는 외침과 함께 900만 관객의 호흡을 붙잡은 <관상>(한재림, 2013). 이같이 호기로운 등장 씬을 마주할 때면 자연스레 엉덩이가 들썩이고 입에서는 외마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영화적 등장을 이야기할 때 빼면 섭섭한 인물이 바로 주성치다. 주성치는 매력적인 호명과 응답의 연출법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영화에 으레 따라붙는 수식은 'B급 코미디'이지만 주요 인물이 도래할 때면 영화는 금세 묵직한 무협으로 장르를 탈바꿈한다.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분위기를 바꾸려면 팽팽한 구심력이 필요한데 주성치는 영민하면서도 경제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해결한다.


먼저 <서유기 월광보합>(유진위, 1995)을 보자. 지지리 궁상 지존보(주성치)가 정말 손오공의 환생일까? 영화 속 지존보는 백정정(막문위)과 춘삼십랑(남결영) 사이에서 구박받고 산적 부하들에게 버림받기 일쑤다. 유쾌한 성격을 제하고는 도저히 손오공과 닮은 구석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지존보가 조요경(요괴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으로 자신을 봤을 때조차도 거울에 비친 상은 인간 지존보다. 관세음보살이 "발에 세 개의 점이 찍히면 손오공이 될 것"이라는 이해 못할 말을 남길뿐이다.

궁금증이 피로감으로 전환되기 직전, 영화는 손오공을 소환한다. 월광보합(타임머신)을 잘못 사용해 500년 전으로 이동한 지존보는 자하(주인)를 만난다. 자하가 지존보의 발에 불꽃을 쏜다. 이로 인해 그의 발에는 이전에 없던 점 세 개가 생긴다. 새로운 일이 생길 것을 암시하는 음악이 흐른다. 지존보가 다시 조요경을 꺼내고 그의 얼굴에 난처함이 만연하다. 관세음보살의 말을 회상하는 지존보(호명). 지존보를 축으로 수평 회전하는 카메라. 조요경에 비친 상은 인간 지존보가 아닌 요괴 손오공이다(응답). 엔딩 끝자락 손오공의 등장은 속편 <서유기 선리기연>(유진위, 1995)을 위한 클리프 행어인 동시에 서유기를 기다렸던 관객의 갈증을 명료한 쾌감으로 해갈한다.


<쿵푸허슬>(주성치, 2004)에서도 주성치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 아성(주성치)이 각성했을 때 영화는 아성의 얼굴을 곧바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아성의 신체 일부와 돼지촌으로 들이닥치는 도끼파 조직원들의 모습이 짧은 컷으로 교차한다. 이러한 편집은 아성에 대한 궁금증과 엄습하는 위험의 긴장감을 부풀린다. 적들에 맞서기 위해 나서는 아성의 등 뒤로 돼지촌 주인 내외는 '절대 고수'의 등장을 고하는데 이 대사가 기점이다(호명).

이후 빠른 템포의 중국풍 음악과 함께 영화는 변모한다. 새롭게 등장한 아성을 한 바퀴 돌아 담아내는 스테디캠은 이 영화의 진주인공이 누구인지 드러낸다(응답). 직전에 사용된 짧은 쇼트 배열과 달리 아성의 등장은 오롯이 아성에게 시선을 집중하게끔 한다. 곧이어 영화는 배경음악을 잠시 소거하고 슬로모션으로 액션을 담는다. 이러한 연출에 관객은 아성의 무용을 여유롭게 음미할 수 있다. 다시 음악이 켜지고 이어지는 아성의 호쾌한 일당백까지, <쿵푸허슬>은 영화의 리듬으로 곡예를 부린다. 아성의 등장 씬은 그야말로 <쿵푸허슬>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서유기 선리기연>의 엔딩 시퀀스에서 전생의 인연들과 스칠 때, <007 북경특급>(이력지, 주성치, 1994) 속 007(주성치)이 처음 검술을 뽐낼 때의 연출도 훌륭하다. 호쾌한 등장은 주성치 영화의 커다란 매혹을 이루는 여러 요소 중 하나다. 실없는 농담의 연속에서 주성치는 주인공이 언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지 적기의 타이밍을 안다. 게다가 그 등장을 어떻게 꾸며야 하는 지도 알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주성치 영화가 단순한 익살극을 넘어 한(혹은 몇) 단계 수준 높은 예술로 평가받는 이유가 아닐까. <CJ7-장강7호>(주성치, 2008) 이후 더 이상 배우로서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가 출연했던 영화를 다시 볼 때면 비장한 음악이 울리기를 기다린다. 그의 등장은 언제나 보는 이의 소년성에 불을 지핀다. 




<서유기 월광보합>

감독: 유진위

출연: 막문위, 주성치, 나가영, 오맹달 등

장르: 코미디, 무협

시청가능플랫폼: 왓챠


<쿵푸허슬>

감독: 주성치

출연: 주성치, 원화, 원추, 황성의, 진국곤 등

장르: 코미디, 무협

수상: 42회(2005) 대만 금마장 시상식 최우수장편영화상, 감독상

시청가능플랫폼: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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