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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구 Mar 09. 2024

내가 기독교인을 그만둔 이유 (1)

상처만 가득했던 모태 신앙


얼마 전에 직장 동료들과 템플 스테이를 다녀왔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나일롱 신자일지언정 스스로의 정체성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던 나였기에, 예전 같았으면 죄를 짓는 것 같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나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스님이 혹시 불교 외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있냐고 물었을 때, 난 끝까지 손을 들지 않았다. 그날 외에도 나는 종교가 있냐는 질문에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한다. 나는 이제 스스로가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나를 '무교'로 규정하기로 했다.






나는 모태신앙이었다. 엄마, 아빠 모두 기독교인이었고 현재도 교회를 다니신다. 특히 아빠 쪽은 3대째 기독교 집안으로서 친척 중엔 현직 목사님도 있다. 모든 가족이 명절 때마다 모여서 제사 대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익숙하고, 결혼이나 장례 같은 경조사도 모두 기독교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어릴 적부터 신앙심이 두텁지 못해서, 엄마아빠의 걱정을 많이 샀다. 정확히는 신앙심보다는 교회 내에서의 입지 같은 것이었는데, 내가 다니던 교회는 지방의 작은 교회라서 교인들끼리 서로의 가계도를 모두 알기 때문에 나의 행동이 엄마아빠의 명성에 먹칠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그 당시 내 또래의 애들은 90% 이상이 찬양팀이나 예배팀 등으로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고, 그런 교회 외부 활동에 전혀 참석지 않는 것은 나와 일부 친구들뿐이었다. 교회는 그런 나에게 엄마, 아빠가 저렇게 신실하신 데 너도 좀 활동을 해야 되지 않겠냐는 은근한 압력을 가해왔고 나는 늘 그것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래도 민감한 얘기다 보니 나에게 직접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어느 날 내가 중3쯤이었을까 나의 꿀 빠는 행태(?)가 참을 수 없었던 어떤 간사님이 나에게 그러시는 거였다. 심지어 내가 늘 헌금을 얼마씩 내는지 체크하고 있었는지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야, 너 이렇게 헌금 안 내고 교회 활동 안 하면 너희 엄마, 아빠가 욕먹는 거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당시 중2병으로 눈에 뵈는 게 없었던 나는, 순순히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짜증을 냈다. 그리고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이런 속물 같은 사람들이 임원이라고 앉아있는 교회라는 족속들에 대해 혐오감이 생겼다. 그러나 내가 엄마, 아빠에게 그 얘길 하면서 교회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자, 엄마, 아빠는 오히려 그 사람과 교회를 두둔하고 나를 크게 꾸중했다.


"그 사람은 뭘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야. 그래도 그렇지. 어른이 그러는데 그렇게 반응한 게 잘한 거니?"

"교회는 사람을 보고 다니는 게 아니야. 그 사람이 별로라고 교회 안 갈 거니?"


나는 엄마, 아빠에게 매우 실망했지만 또 한편으론 중학생이다 보니 내가 아직 신앙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사람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나가야 하는 신앙심이 없어서 그랬다고 생각했음) 그래서 이후 신실한 또래들이 다 가는 수련회도 억지로 참석하고, 일부 감동적인 설교를 들으며 억지로 감정이입하고 눈물을 흘려보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이제 입시도 끝났으니, 어른들이 그토록 내게 바라던 교회 활동에도 참여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 의문과 교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가장 나를 교회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던 것은 당시 친했던 친구들과 목사님의 배신이었다. 나는 수도권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자주 내려가봤자 2주에 한 번꼴로 그 교회에 갈 수 있었는데, 나머지 애들은 다 고향에서 학교를 다녔고 어렸을 때부터 교회 활동을 같이 하던 사이라 친하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게다가 그들처럼 신앙심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바깥의 일반인 시선으로 좀 민감한 얘기를 할 때가 있었는데 (ex. 대형 교회 목사의 탈세 얘기) 그들은 내가 그런 얘길 하는 것 자체를 매우 불편해했다. 나도 그들 사이에서 점점 소외되는 것을 느꼈고, 그나마 친구들 보러 교회 가던 재미도 사라지게 되자 나는 교회활동도 잘 안 하고 교회도 점점 뜸하게 가게 됐다.


그러다 몇 주 후 담당목사님으로부터 안부를 묻는 문자가 왔고, 나는 당시 순진하게도 그분만큼은 이 교회에서 꽤 믿을만한 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실대로 내가 교회 내 또래집단 사이에서 겪는 은근한 소외와 그로 인한 고충을 털어놓았고, 이건 그들을 벌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순전히 목사님을 믿고 고민상담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겐 절대 내가 이런 얘길 한 것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목사님은 철저히 당연히 그들의 편이었다. 아니, 애초에 나한테 연락한 목적 자체가 그들의 요청이었을지 몰랐다. 그 후 오랜만에 나간 교회에서 나는 전보다도 더 냉랭하고 따가워진 시선을 느낄 수 있었고, 이전엔 그냥 어색하고 불편한 정도였던 사이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어긋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사님이 다 말했구나. 나는 대번에 감지했고 큰 상처와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그 후 그 교회 청년부에는 두 번 다시 나가지 못했다.


이외에도 그 작은 교회가 나에게 행했던 정신적 폭력은 수두룩했다. 자격 안 되는 목사, 전도사, 간사 등이 설교랍시고 뿌려대는 자기 주관들, 이를테면 최진실은 자살했기 때문에 지옥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밀양의 전도연은 유괴살해범을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항의했기 때문에 잘못됐다 등등. 또 수많은 시대착오적이고 폭력적인 발언들, 예를 들면 아내는 남편을 섬겨야 한다, 목사 말씀에 토 달지 마라 등등. 그리고 교회 특유의 수많은 사생활 간섭, 지나친 개입, 험담, 무리 짓기 등등...


나는 정말 오랫동안 상처받고 지쳐서 그 교회가 너무 싫었고, 그 교회만 아니면 나도 '정상적인 기독교인'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오래 몸담았던 커뮤니티를 옮기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이 있었고, 또 내가 그 교회에서 느끼는 불편함이 그냥 어린 마음에 부리는 투정 같은 거라고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엄마, 아빠와 같이 교회를 옮기는 게 거의 불가능이라는 것을 깨닫고, 대학 생활(수도권 타지 생활)을 이유로 수도권에서 교회를 다니겠다며 엄마를 안심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그 교회를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서도 이런저런 교회를 여러 번 가봤다가 거리나 종파 문제로 포기하게 되면서, 나는 그냥 교회 찾는 것을 포기하고 몇 년간 아예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됐다. 엄마는 주일을 섬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일요일마다 주말에 있는 내게 전화해 교회에 갔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때마다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치며 실제론 가지 않았다. 나중엔 엄마가 의심하니 근처 교회 홈페이지의 주보까지 읽어보고, 대충 그날 설교 내용을 지어내서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마음속 일말의 죄책감을 제외하곤, 거의 무교인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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