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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구 Mar 20. 2024

욕 먹는 게 너무 싫다

날 언제든 욕할 수 있는 사람들


오늘도 기분이 아주 제멋대로 날뛰었다.


점심시간 직전에 타 팀에서 신제품 원가가 변동된 이슈로 내게 살짝 따지듯이 카톡을 보내왔다. 1월에 내가 원가를 공유하면서 바뀌지 않을 것 같다고 얘기한 것을 믿고 영업을 다 해놨는데, 갑자기 원가가 바뀌게 돼서 난감하다는 입장이었다. 마음은 이해가나 원료값이 오른 거고 나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거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답변했는데, 원가 변동 이슈로 본인이 일을 번복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인지 그 이후에도 상대방이 약간 아쉬움의 뉘앙스를 풍겼다.


사실 카톡 내용이 세지도 않았고, 충분히 내가 잘 설명해서 마무리할 수 있는 사안이었는데도 또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짜증에서 그쳤을 일인데 화가 나고 심지어 눈물까지 날 뻔했다. 주변 동료는 최대한 내 기분을 맞춰주려고 했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힘들어할 일이 아닌데 힘들어하는 것에 조금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후 실장님께 보고 드리고 실장님이 내 잘못이 없다고 말해주시는 것에서 1차 안심이 되고, 또 그 상대방도 생각해 보니 원가가 올라도 영업에 문제없을 것 같다고 말해주자 그제야 2차 안심이 되며 불편감이 해소됐다. 하지만 그럴 일이 아닌데도 내가 요즘 들어 예전에 비해 쉽게 좌절하고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욕먹는 게 너무 싫다


집에 와서 마음을 잘 들여다봤더니, 나는 추후 그분이 영업에 실패했을 때 내 탓(또는 우리 팀 탓)을 할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실제로 그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그 단계까지 상상이 되면서 그분이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또 이해가 가서, 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괜히 눈치 봐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 자체가 불편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편으론 무력감을 느꼈다. 늘 어떤 일이든 차질을 주지 않으려고 최대한 여러 번 확인하고 꼼꼼하게 처리하는데 9를 잘해도 1을 못하면 바로 비난받는 것이 허탈했다. 사실 직장인이 자기 직무 잘 소화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나는 BM으로서 최대한 영업이나 관련 부서의 편의를 위해 2번 할 거 1번에 끝낼 수 있게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에서도 내가 챙기지 못하거나 작은 실수라도 하면 너무 쉽게 비난받는 것 같았다.




억울하게 욕먹은 경험이 주는 트라우마


그리고 내가 이런 마음(피해의식, 두려움)이 생긴 건 확실히 최근 한 달이 안 됐는데, 그 배경에는 확실히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다.


심리상담까지 받으면서 떨쳐내려고 노력했지만, 한 번 자리 잡은 트라우마는 없어지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언제 어디서나 욕먹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한 번 느끼기 시작하자 어떤 상황에서든 욕먹을 일을 회피할 생각부터 하게 되는 날 발견했다.


물론 내게 트라우마를 준 그분도 내가 이렇게까지 크게 영향을 받을 걸 알고 그러신 건 아닐 거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순간적 감정과 판단에 따라 본인의 직급을 이용해서 내게 한 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일 거다.


하지만 나는 그로 인해 직장생활에서의 큰 무기를 하나 잃어버렸다. 바로 자신감이다. 난 그래도 1인분은 하고 있다는 생각, 나는 이 일과 잘 맞는다는 생각 등을 했었지만 지금은 모두 의심하게 됐다. 오히려 그날 이후 감정조절을 못하는 나 자신이 팀에 피해를 주고 있다는 죄책감뿐이다.





어떻게 해야 이 긴 두려움을 떨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잘해보고 싶고, 이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으며 이 팀을 잘 유지하고 싶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앞으로도 내가 못해서든, 아님 억울하게든 욕먹을 일이 아예 없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BM이 원래 그런 위치이기도 하다. (내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모 팀장님의 말에 따르면, 그저 ’ 앵무새‘처럼 말 전달만 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너무 먼 일이지만 추후 팀장과 같은 관리자가 된다고 하면 더 그래야 한다. 그때는 중간에서 욕먹는 게 아예 일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내’ 잘못이 아니라는 이유로 회피할 순 없겠지.


그렇담 결론은 내가 욕먹는 것을 필수불가결한 일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결론이 그렇다. 하지만 정말 부당하게 욕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냥 참지 말고 받아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나는 그동안 나보다 높은 직급, 또는 그 회사에 더 오래 있었던 사람들한테 욕을 먹었던 터라 늘 억울해도 참고 속으로 삭일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커다란 블랙홀이 돼서 내 행복이나 긍정적인 기운을 모두 빨아들이고, 불안이나 공포만 내뱉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론적으로 말하니까 쉽지만 실제로는 어렵다. 실제 욕먹을 때는 내가 잘못한 것, 잘못하지 않은 것들이 교묘하게 섞여서 어디부터 해명해야 할지 애매한 경우가 많고, ‘잘못’에 대한 기준도 모두가 달라서 누구는 잘못이라 생각하는데 누구는 아닐 때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바로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그저 내가 욕먹을만한 상황이었던가? 하고 곱씹다가 결국 화낸 사람은 이미 가버리고 나만 남아서 억울하고 슬픈 감정과 싸우게 될 뿐이다.





결론 : 퀘스트라고 생각하기


프로 예민러에게 나에게 언제든 욕할 수 있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는 회사라는 환경은 곧 나에게 언제든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는 전쟁터 한가운데나 다름없지만 … 그래도 회사를 바꿀 수 없다면 싫어도 내가 적응해야 한다.


잊어버려라,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라, 화내면 나만 손해다 등의 조언을 많이 들었지만 쉽게 되지는 않았다. 조언을 해준 사람들이 잘못 조언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마음을 비우려고 하는 방식으로는 크게 내게 와닿지 못했다는 것.


그럼 그냥 이것도 내 레벨을 증명하는 하나의 퀘스트로 생각하면 어떨까? 승부욕과 인정 욕구가 강한 나는 스스로도 짧은 시간에 많은 과업을 완수하거나, 내 역량을 동원한 기획안 등이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 특히 뿌듯해하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러면 결국 저것도 내가 헤쳐나가야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할 일을 까먹지 않기 위해 작은 부분까지도 다 To-do List로 만들어서 완료할 때마다 하나씩 지우고 그것에 후련함을 느낀다. 그러면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 대한 것들도 그냥 ‘해야 할 일’이라고 적어놓으면 어떨까?


‘(자꾸만 빨리 해달라고 재촉하는) OOO 님에게 완벽한 연기로 웃으면서 일정 알려드리기’

‘(누군가 나에게 짜증을 냈을 때) 기분 나쁜 마음 잘 정리하고 업무 복귀하기‘

‘(뭘 잘 모르는 사람이 내 탓을 할 때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정확&친절하게 상황 설명해 주기‘


그러면 회사에서 내 업무를 방해하는, 언제든 날 공격할 수 있는 위험 요소들로 느껴졌던 것들이 그냥 또 하나의 퀘스트, 해야 할 일로 느껴져서 스트레스는 덜 받고 오히려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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