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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Feb 11. 2022

최고의 디저트를 맛보다

영화 <메모리아(memoria)>

어떤 작가는 마음이 너무 들뜨거나 가라앉지 않고 담담해지는 시간에 글을 쓴다고 한다. 그래야 좋은 글이 나온다고 한다. 반면 나는 글도 그림도 그냥 하고 싶을 때 (충동적으로) 한다. 내게는 주로 감정이 고양되었을 때이자 표현하지 않으면 안에서 넘쳐 어딘가에라도 생각의 파편을 담아야 할 때인 것 같다.

오늘 내가 글을 쓰게 된 것은 발견의 기쁨을 담아두고 싶어서이다. 경이로운 영화를 보고 나서 잊지 않고 싶어서이다. 비록 이 영화의 상영관에 나는 유일한 관객이자 방치된 존재가 되었지만. 극장 직원을 찾아 상영관 문을 닫아달라고 다급하게 요청해야 했지만(스위치로 문을 작동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래서 오프닝 크레디트 타이틀을 놓쳤지만 말이다.


<메모리아>는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태국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이다. 그는 칸 영화제에서 사랑받는 감독인데 <메모리아>는 2021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영화이자 봉준호 감독의 <옥자>처럼 그가 시도하는 첫 영어 영화라고 한다. 영어 영화를 표방하지만 작품의 배경이 콜롬비아인 관계로 스페인어를 많이 사용한다.    


영화는 주인공 제시카(틸다 스윈튼)가 굉음에 잠을 깨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굉음은 사람이 걸터앉기 좋은 커다란 바위 크기 쇠로 된 무겁고 둥근 공이 이끼가 살짝 덮인 콘크리트로 사면이 둘러싸인 방 바닥에 던져지는 듯한 소리 비슷하다. 묵직하지만 관객을 압도하는 소리다. 실체는 없으나 제시카에게만 들리는 이 미스터리한 소리를 따라가는 여정이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이다.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그녀를 괴롭히는 이 소리는 과연 무엇일까?

한편, 그녀 주변에서 일어나는 아니면 그녀에게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상과 평범한 환영이 뒤섞인 듯한 영화적 현실은 제시카의 망상인가 아님 그녀가 몸소 경험하고 있는 것인가? 영화 속 상황들은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이어서 나는 제시카를 의심하기보다는 그녀의 고통을 믿으면서 영화를 관람했다. 그 소리의 근원은 개인의 과거에서, 역사의 기억에서, 자연의 움직임에서, 누군가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영화 <메모리아>의 틸다 스윈튼

영화는 시종일관 애매모호함을 유지하기에 관객이 스스로 영화를 느끼고 해석해야 한다. 영화 관람이 아니라 마치 설치미술이나 미디어 아트를 감상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뚜렷한 서사가 없고 여러 개의 층을 이루는 소리나 음악, 그리고 다양한 이미지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충돌할 듯 조화를 이루는 영화이다. 불친절한 전개와 낯섦을 관객이 즐길 수 있다면 이 영화는 마음속에 보석처럼 다가온다. 객석 등이 켜진 후 영화관을 나올 때까지도 나는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난해한 영화에서도 명연기를 한 틸다 스윈튼이 새삼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영화 관람 다음 날 동트는 처럼 내게 서서히 물든 이 영화는 마스터피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명의 천재 감독을 발견했음을 직감했다. 수면 중 머리 주변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큰 소리를 듣는 폭발성머리증후군을 감독이 실제로 경험하면서 이 영화의 씨앗이 탄생했다고 한다. 감독은 작은 씨앗 하나로 시작해 여러 종의 식물이 생태 하는 아름다운 정원을 완성했다. 안개가 갠 뒤에 나타나는 예상치 못한 희귀하고 경이로운 장관을 본 느낌의 영화였다. 모든 이미지들이 내게 말을 하고 뒤늦게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 예술하는 사람들이 영감을 얻기에 더없이 좋은 작품이다.


영화 <메모리아> 다른 이들에게는 너무 이국적이고 낯설어 시도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음식일지도 모른다. 해외여행에서 입에 안 맞는 현지 음식을 피해 한국 식당만 찾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게 이 영화는 최고의 파티시에가 만든 겹겹의 얇은 층으로 이뤄진 디저트를 맛보는 것 같다. 맛은 주관적이고 한마디의 언어로 전달되기 어려워 직접 음식을 먹어봐야 아는 것처럼 이 영화도 직접 봐야만 그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보기에는 아름답고 먹으면 입을 즐겁게 하는 디저트를 접한 후 마음에 여러 겹의 포만감이 오래 유지되는 것처럼 이 영화는 내게 그렇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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