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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Dec 17. 2021

시, 영화, 인생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The Truth>,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을이 되면 단풍으로 물든 나무와 낙엽을 보며 각자 나름의 감상을 하나씩 새기게 된다. 나는 몇 해전까지만 해도 이런 자연현상을 단순히 아름답다, 쓸쓸하다고 이분법적으로만 느꼈다. 그런데 요즘은 나이가 들었는지 쓸쓸함은 모르겠고 그게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별다른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고 모든 게 싫어지던 11월의 어느 날도 그랬다. 그날 나는 먼지처럼 쌓여있는 생각들을 털어내기 위해 무작정 집을 나와 집 앞 공원으로 향했다. 외투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공원을 조금 걸었는데 유난히 명랑한 표정을 가진 나무 한그루가 나타났다. 누군가의 붓터치가 지나간 것처럼 선명한 노란색으로 물든 나무였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그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나뭇잎은 노란 병아리처럼 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어두움에도 굴복하지 않을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람의 간지럽힘에 노란 잎바르르 떨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나의 어둠을 걷어냈다. 너그러운 자연은 내 마음에 쌓인 먼지를 촛불 끄듯 한입에 '후'하고 불어버리고는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좀 있으면 낙엽이 될 단풍잎들은 떠나기 전 가장 눈부신 모습을 허공에 각인시키면서 그렇게 순풍에 몸을 맡기는 듯했다.

 

그 가을날의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어느 가족>, <태풍이 지나가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을색이 짙은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The Truth>이 그렇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기차가 지나다니는 곳 근처, 파비안느의 집 정원에 단풍으로 곱게 물든 나무 한그루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프랑스 대배우인 파비안느는 이제 막 자서전을 출간했다. 누구보다도 자서전의 내용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팬뿐만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파비안느의 자서전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랐다. 자서전에 그녀를 돕는 매니저를 언급한 내용이나 배우 생활로 엄마 역할을 소홀히 했던 내용은 없다. 그녀의 주변인들에게 그 자서전은 연출된 대본처럼 느껴진다. 마치 그녀가 영화 속 역할은 충실히 해내지만 현실 속에서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길 어색해하는 것처럼. 관계가 소원했던 엄마의 진심을 자서전으로라도 읽고 싶어 했던 딸은 결국 실망한다. 그녀의 자서전에 빠져있는 진실이란 어떤 것일까?

한편, 파비안느는 새롭게 촉망받는 젊은 여배우와 함께 영화 촬영을 한다. 앞날이 창창한 후배를 보며 파비안느는 괜히 기싸움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아무리 떠오르는 스타라도 자신의 자리를 넘볼 수 없다는 듯 그녀는 촬영 현장에서 주도권을 잡고 싶어 하는 듯하다. 하지만 젊은 여배우에게 밀려 배우로서 자신의 입지가 변화하는 걸 느낀 파비안느는 괜히 자존심이 상한다.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가는 세월을 막고 싶어서 떼쓰는 철없는 할머니 같다.

결국 파비안느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표현하지 않았던 진심을 사람들에게 조금씩 드러낸다. 자서전에 쓰지 않은 진실도 딸에게 들려준다. 그녀가 자신의 속마음을 가려두었던 오래된 커튼을 걷어내자 상황은 순조로워진다. 젊은 여배우와의 촬영도 그렇고 매니저, 그리고 딸과 그녀의 관계도 그렇다. 그제야 집 근처를 매일 지나다니는 기차소리가 파비안느의 귀에 들리는 듯하다. 자신을 내려놓고 삶에 순응하자 세상의 아름다움이 자세히 보이고 들리는 것처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파비안느는 어떤 영화감독의 영화를 "영화가 시적인 데가 없다"라고 비평한다. 이 대사가 계속 기억에 남아서 "영화는 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감독이 내게 말하고자 하는 진실로 다가왔다. 내가 생각하는 시는 희미하면서도 또렷하고 프면서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 인생도 한 편의 영화와 같으니 시를 닮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시적인 것'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어떤 사물을 우리가 평소에 봐왔던 것과는 다르게 재평가되게끔 하는 것이 시가 아닌가. 쉽게 말해서, 일상 속에서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것에 문뜩 눈을 멈추게 하는 게 '시적인 것' 아닌가."

김시선 저, <오늘의 시선: 하드보일드 무비랜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난 이야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에 나왔던 나무의 모습을 보여준다. 잎을 떨구고 헐벗은 나무의 모습은 조금씩 허물을 벗어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려는 파비안느를 닮은 것도 같다. 그리고 꽃이 피면 지는 때가 있다는 자연의 법칙과 유사한 인생사를 상징하는 듯도 하다.


불혹이 지난 나이, 나는 인생에서 한창 피어올랐다가 잎 하나가 이제 막 떨어지는 시기를 맞이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쉽지는 않다.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보다 순응하는 삶이 위대하다는 것도 이제 알기 때문이다. 나의 아름다운 시절을 잊지 않으며 나도 가을 낙엽처럼 순순히 바람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겠다. 일상에서 매일 마주하는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밟지 않고 들여다보면서, 흙으로 파묻어버리지 않고 반갑게 인사하면서... 나를 멈추게 한 노란 단풍나무 아래에서 '시'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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