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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Mar 12. 2021

내 인생에서 잊히지 않을 영화

<미나리>를 보고 싶어 했지만 영국에서 이렇게 빨리 보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였다. 변이 바이러스로 인한 봉쇄령으로 영국의 영화관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 화제인 <미나리>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2월 말, 이 영화가 영국 글라스고 영화제에서 온라인으로 상영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미나리>를 보고 새벽 3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오전에 카톡으로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미나리>를 보고 나서 몇 시간 후, 한국 대학병원의 중환자실에서 투병 중이던 내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내 브런치의 글에도 종종 등장했던 친구였다. 나는 <미나리>라는 영화를 계속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그 친구가 내게 남기는 마지막 말들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친구의 삶에 영화도 일정 부분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런 식의 작별 인사도 나는 납득이 되었다. 영화 <미나리>는 이제 내 인생에서 잊히지 않을 영화로 남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자들에게 그러하듯, 제이콥(스티븐 연) 가족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다. 제이콥은 새로운 꿈을 위해 가족을 데리고 황무지 벌판으로 이사를 온다. 아내 모니카(한예리)는 누추한 트레일러 하우스에서 살림을 꾸리게 돼서 남편의 대책 없는 도전이 무척 못마땅하다. 모니카는 현실적인 것을 먼저 판단하는 엄마이고 제이콥은 일단 일을 벌여놓고 보는 아빠였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상황이라 결국 외할머니(윤여정)가 미국에 와서 아이들을 돌보게 된다. 이후 허허벌판 속에 버려진 것 같은 이들 가족의 삶 속에 좌절과 희망이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한다. 나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영화의 리듬과는 반대로 마음을 조리며 그들의 삶을 지켜보았다. 의지할 곳 없는 이방인의 삶에서 현실의 내 모습도 보였기에 제이콥 가족에게 마음이 쓰였다.


누군가는 극적인 전개가 별로 없어 심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나는 소박한 밥상 같은 이 영화가 좋았다. 가족의 기념일 날에도 화려한 이벤트채우기보다는 담담하게 일상처럼 보내는 것이 게 더 익숙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평소 할리우드의 과장된 영화보다 예술 영화를 더 선호하는 나의 취향 탓도 있을 것이다. 조용한 발자국처럼 따라가는 영화 음악도 좋았고 모든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최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고, 가디언의 영화 평론가 피터 브래드쇼도 인정하는 윤여정 배우님의 연기는 두말할 것도 없다. 어느 날 밤, 애한테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모니카를 야단치던 할머니의 모습은 우리 엄마로 빙의 것 같아 보면서 큭큭 웃음이 났다. 또한 아들 데이빗의 어린이다운 사랑스러움도 이 영화에 가득 묻어난다. 순수하고 익살스러운 데이빗을 보엄마 미소가 저절로 나온다. 그래서인지 데이빗 역의 앨런 김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이 두 배우의 멋진 앙상블이 할머니와 손주가 서로에게 적응해 가는 과정을 아련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아이 엄마로서 감정 이입이 되던 모니카 역의 한예리의 연기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이 연기의 결이 섬세했다.        



"미나리 원더풀, Life is wonderful"

'고통이 있음에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어 인생은 아름답다.' 고 영화를 통해 내 친구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사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나는 영화에서 제이콥 가족의 삶이 비극이 되지 않길 바랬다. 해외에서 산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무게의 고립감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기에 고달프기까지 하면 너무 서럽다. 이런 나의 마음 때문인지 영화 속 막막한 현실에서 감사한 순간들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자세히 말하고 싶지만 스포하지 않기 위해 간략하게만 적어보겠다.       

우선 낯선 땅에서 맺은 인연 '폴'이 그렇다.    

막 농장을 꾸리려는 제이콥에게 지저분한 옷차림에 약간 이상해 보이는 폴이 트랙터를 넘겨주러 왔다. 그런데 폴이 일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냐고 떠보며 제이콥이 자신을 고용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외모와 제스처에서 느껴지는 폴의 모습은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탐탁지 않은 구석이 많다. 폴의 과장된 행동을 보면 좀 미치광이 같기도 해 보통 사람이라면 그를 꺼렸을 것이다. 하지만 제이콥은 별 고민 없이 그를 일꾼으로 고용한다.

또한 이 가족의 삶에 몇 번의 위기가 찾아오는데, 영화 후반부에 농산물 저장 창고가 불타는 사건이 있다.

절묘한 타이밍에 일어난 이 일이 그들의 계획을 우회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기까지 한다.      



지금 그늘 속에 있다는 건,  
 어딘가에 빛이 있다는 뜻      
                                                                                                                                                                      

폴이라는 인물도 그렇고 창고의 화재도 그렇고 겉으로 보기엔 골치 덩어리로 판단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당장 불행처럼 보이는 일들이 때로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듯, 제이콥 가족에게 이런 인연과 사건도 마찬가지로 다 의미가 있다. 나는 그들 곁에 폴이 있어서 참 다행이고, 창고에 화재가 났지만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아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은 언뜻 보면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감사하고 아름답기도 한 순간들도 곳곳에 숨겨져 있다. '지금 그늘 속에 있다는 건, 어딘가에 빛이 있다는 뜻'이라 <일곱 해의 마지막>에 적힌 구절처럼 말이다. 아무리 주위가 어두컴컴하더라도 보물 찾기를 하듯 빛의 순간들을 찾아내야만 우리는 계속 숨을 쉴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나와 내 친구와의 그렇게 갑작스러운 이별에도 어떤 의미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는 생명력이 강한 미나리는 험난한 이 세상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내 친구가 내게 '너도 미나리처럼 그렇게 살아남으라'라고 '쉽게 부러지지 말라'라고 당부하는 듯했다. 영화 <미나리>는 힘부치는 순간에 어디선가 부는 바람과 함께 들려오는 나지막한 허밍처럼 느껴졌다. 듣기도 좋지만 부르면 마음이 편해져서 왠지 내 입에서도 자주 맴돌게 될 것 같은 그런 허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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