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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Apr 27. 2023

어떤 기억

런던 시내의 북적이는 거리와 상점들은 곧 있을 왕의 대관식으로 분주해 보였다. 서점에는 아이들의 그림책을 포함하여 새로 추대될 왕에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태생이 귀하다는 이유로 도덕적인 잘못을 저질러도 죽을 때까지 귀하게 대우받을 한 사람 때문에 온 동네가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다.

같은 날 오전, 나는 런던에서 제일 유명한 공원 안에 위치한 갤러리로 향했다. 오랜만에 갤러리 안에 들어서는데 예전에 내가 방문했을 때와는 공기가 사뭇 달랐다. 유난히 차분했다. 갤러리 안의 어두운 상영관에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앉을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친구와 나는 복도 계단에 앉았다.

흰색 스크린이 관객들을 한참 동안 맞이했다. 조금 오래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자 하늘에서 바라본 영국 도시의 풍경이 나타났다. 헬리콥터를 타고 촬영한 장면이었다. 질서 정연하게 구획이 나뉘어 줄지어진 주택들과 도로, 그리고 건물과 공원 등이 내려다 보였다. 헬리콥터의 소음과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도 들렸다. BTS가 공연했던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이 보이자 카메라가 천천히 런던 서쪽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꺼멓게 불에 그을린 한 고층 아파트가 나타났다. 그 건물은 2017년에 큰 화재가 일어난 그렌펠 타워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들리던 헬리콥터의 소음과 도시의 소음은 어느새 모두 사라졌다. 카메라는 검게 타버린 그렌펠 타워 주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타워 전체의 모습과 각 층의 모습, 그리고 누군가의 집이었을 공간 내부가 보였다. 24분 남짓한 시간 동안 관객들은 잿더미가 된 그렌펠 타워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모조리 깨진 창문, 건물 외벽과 창문을 이어 누군가 탈출하려고 시도한듯한 흔적, 다 타버린 건축자재의 질감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다 타고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서 누군가의 절박한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고, 불을 피해 탈출하려 애쓰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천천히 한참 동안 그렌펠 타워를 보여주던 영상에 다시 도시의 일상적인 소음이 끼어들면서 스크린은 블랙아웃되었다.

객석은 이내 먹먹함으로 가득 찼다. 상영관을 나서던 관객들은 화재참사로 희생된 72명의 이름을 마주하였다. 희생자들의 이름으로 채워진 갤러리의 흰색 벽 앞에는 하얗고 기다란 벤치가 놓여 있었다. 나는 잠시 그곳에 머물러 앉아있다가 갤러리를 떠났다. 관객들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갤러리 밖으로 나갈 때까지 침묵만이 그곳에 머물렀다.

 

영화 <노예 12년>을 연출한 스티브 맥퀸은 30년  그렌펠 타워에 살던 친구 집을 방문했었다. 그는 과거 일정기간 그렌펠 타워가 있던 주변 지역에 살았던 경험도 있다. 추억이 가득한 그 장소에 심각한 화재 참사가 일어나자 그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화재로 인해 흉물이 된 그렌펠 타워 전체를 현수막 같은 걸로 가려둘 거라는 공식 발표를 들은 그는 부랴부랴 카메라를 챙겨 헬리콥터에 몸을 싣는다. 화재가 일어난 6개월 후인 2017년 12월 겨울의 일이었다.

스티브 맥퀸은 이 작품 <그렌펠(Grenfell)>을 통해 예술가의 도리를 충실히 다한 것 같았다. 그의 작품을 보는 동안 관객 모두가 숨죽이며 화면 속에서 사라진 이들을 추모했다. 통째로 다 타버린 24층짜리 아파트를 보며 내 마음속은 의문들로 가득 찼다.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15분 만에, 그 순식간에 불길이 건물전체를 덮쳤다는 목격자의 증언을 믿게 되었다. 살려달라는 절규와 함께 아이를 건물밖으로 던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상황이 납득되었다. 영상을 보는 내내 2014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어떤 참사가 머릿속에서 계속 오버랩되었다.

<그렌펠>은 앞으로 영국 국민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역사적인 축제인 대관식을 앞둔 이 시점에 시민들의 안식처인 공원 갤러리에서 상영되고 있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야 할 기억이 사람들을 다시 과거로 초대하고 있었다.

  

 “Tired? Oh my God no. It’s the reverse. It gives me energy. Justice  gives me energy. Truth gives me energy … It needs to be shouted from the  highest rooftops.”  

스티브 맥퀸, 가디언과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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