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여름방학 기간 동안 한국을 방문했다. 이제 영국에 정착해 산지도 5년이 다되었으니, 한국에 오면 영국과 한국의 다른 점들이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각각의 사회 구성원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정서가 다르게 와닿는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의 영국에서 나는 투명인간이 된듯한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해소되기 어려운 이방인의 외로움을 지니며 산다.
이번에 한국에 왔을 땐 내가 기대하던 고국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며 약간은 혼란과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간 식당에서 무언의 시선으로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그리고 뉴스에서 보이는 잇따른 칼부림 사건들을 보면서 한국인의 삶이 각박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영국인들과 달리 어딘가 날이 선 한국인들이 좀 예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혼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또, 20-30년 이상 알고 지낸 한국의 벗들을 만나면 고향의 정과 푸근함을 느끼게 된다. 마음의 빗장이 풀려 내 마음에 순식간에 여러 개의 방이 만들어지곤 했다. 영국에서 지낼 땐 무채색의 텅 빈 방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것 같았는데, 어느새 폭신폭신한 풀밭 위에 햇살이 드리워지고 동물들도 뛰어노는 그런 방이 마법처럼 짠 나타난다.
한국의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내 마음을 쩡찌 작가님이 잘 표현해 주신 것 같아 아래에 옮겨본다.
"나는 모르고, 친구는 아는 음악을 무심하게 흘리다가 친구들의 얼굴을, 그 밝은 이마를, 대화의 결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부드러운 손을, 이제는 제법 단단해진 말들이 오가는 것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가슴에 뭔가 차오르는데 정체는 알 수 없고
골똘하다가 자리가 파할 즈음 나, 나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래서 오래 너희의 친구로 남고 싶다고 소리치곤 허겁지겁 두고 떠난 것을 쫓은 듯 숨차했다." <땅콩일기, 쩡찌>
여름에 한 달 남짓 고국을 방문하면, 짧은 기간 동안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특수요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볼일과 지인 만남등의 바쁜 스케줄로 하루하루를 가득 채우고, 미션을 클리어하며 달력의 날짜를 지운다. 특히 이번에는 아이와 함께 왔기 때문에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매일 밖으로 나갔다. 초등 고학년인 아이는 장난감 없이 집에서만 지내면 지루해하고 할머니의 휴대폰 게임을 하거나 TV만 보려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이와 롯데월드에 가서 하루종일 놀다가 밤 10시 넘어 4호선에 몸을 실었다. 롯데월드에서 2-3분의 짧은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한 기구당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렸던 탓에 몸이 몹시도 피곤했다. 그 늦은 시각, 4호선은 앉을자리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때 지하철 기관사님이 마이크를 켰다.
"오늘 하루도 수고 정말 많으셨습니다. 걱정과 근심은 모두 이곳에 두고 내리십시오..."
그 뒤의 말은 기억이 잘 안 난다. 기관사님의 멘트에 몸과 마음의 피로가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내가 추억하고 기대하던 고향의 모습이 아직은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그렇지만 바로 몇 분 뒤, 마을버스를 타는데 자리를 바꿔 아이를 먼저 타게 했더니 꾸물거린다며 짜증을 내는 아주머니 때문에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말하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 주는 내 친구들처럼, 고향은 그런 넉넉한 곳이라고 기대하면 이제는 안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다시, 내 마음 한 켠을 고향에 두고 올 것이 뻔하다. 떠나기 전부터 고국을 그리워할 것임을 안다. 밤에 별처럼 빛나던 풀벌레 소리, 가족의 웃음, 친구들의 미소, 도시의 소음, 사람들로 빽빽한 지하철, 모두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