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가면 늘 대충 보던 그림이 정물화였다. 여행 중 미술관에 들릴 경우에 시간이 없으면 건너뛰던 그런 그림이었다. 나에게 미술관에 가는 목적은 테이블 위에 놓인 화병의 꽃이나 과일을 보러 가는 게 아니고, 그림 속에서 이야기를 찾기 위한 것이어서 그렇다. 초상화에서는 모델의 표정과 의상, 그리고 배경이, 풍경화에서는 그 안의 시간과 공간이, 추상화에서는 무질서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물화에서 가만히 있는 오브젝트들이 나에게 무슨 얘기를 해주려는 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해골이나 시계, 그리고 과일과 죽은 새가 함께 그려진 정물화가 삶의 번성과 죽음이라고 한 누군가의 해석에 가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다.
몇 달 전 정물화가 주를 이루던 Pasquarosa: From Muse to Painter전시회에 함께 간 내 친구도 정물화가 지루하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녀의 말에 수긍이 갔다. 나도 이전에는 정물화 앞에서 거리감을 느끼며 어색해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물화를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지난겨울,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Scottish National Gallery)에 갔다가 신기한 경험을 했다. 정물화 앞에서 내가 이례적으로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다. 나를 사로잡은 그 작품은 스코틀랜드 화가 앤 레드패스(Anne Redpath)의 정물화 <Still Life with Milk Bottle>였다. 일상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담아낸 이 작품 앞에서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단정하게 자유분방한 미스 매치된 여러 개의 찻잔들, 귀여운 쥐가 그려진 찻주전자, 요즘도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의 펭귄 출판사의 책, 그리고 과시하지 않고 묵묵히 모습을 드러낸 화병 안의 꽃이 차분한 톤의 유화 물감과 조화를 이루었다. 앤 레드패스는 자신의 집에서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자신이 가장 자주 머무르는 일상적인 공간과 자주 사용하는 도구를 캔버스에 담아냈다. 그래서인지 정물화지만 그녀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선 것 같고, 더 나아가 그녀의 일상까지도 느껴졌다. 어렴풋이 작가가 어떤 사람일지 짐작이 가서 그녀에게친밀감도 느꼈다. 그녀가 이 작품을 그릴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던 터라,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 자신의 그림을 음식이나 생필품으로 교환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일상의 고난함은 그림에 묻어나지 않았다. 미술관 밖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조명들로 반짝이고 관광객으로 북적였지만, 나는 앤 레드패스의 소박한 응접실에 초대되어 잠시 편안히 휴식을 취했다. 여행의 들뜸과 좋은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 제한된 일정에 대한 초조함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캔버스 안에 가만히 놓인 물건들이 내 마음을 차분하게 해줬다. 정물화를 보며 처음 이런 감정을 느껴 신기했고, 그 후 이 기억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날 이후 정물화에 대한 나의 생각은 크게 바뀌어 이 분야에 좀 더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Anne Redpath, Still Life with Milk Bottle (1945)
<하루 한 장, 인생 그림>의 저자 이소영도 정물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버릴 정도는 아니어도 '마음에 휴식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내 안의 울림이 들린다. 그럴 때 컴퓨터 한구석에 숨겨놓은 곱디고은 정물화들을 떠내 본다. 움직이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림 속 물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마음이 안온해진다. -<하루 한 장, 인생 그림> 중 앙리 팡탱 라투르 <정물화>에서-
미술 관련 강의를 활발히 하는 전문가도 정물화에 대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반가웠다.
생색내지 않고 자신의 쓰임을 다하는 소품이 그려진 정물화는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고 소소한 일상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그리는 그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창하고 드라마틱한 이벤트가 없어도 있는 그대로의 삶에 가만히 머무르고 음미할 줄 아는 사람들이 그리는...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편안한 심상이 내게도 전달되는 듯하다. 반복되는 일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정물화를 그리는 화가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