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산문] 69.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1 _채사장 지음
“아빠, 오늘은 회사 안 가면 안 돼요?”
출근 준비로 바쁜 아침, 부스스 잠에서 깬 아이가 내게 묻는다.
“아빠랑 헤어지는 게 아쉽구나? 그래도, 아빠는 회사 가서 돈을 벌어야 해. 그래야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장난감도 살 수 있어.”
“그럼 엄마는?”
“응, 엄마는 회사 안 가도 돼”
“왜?”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에게 뭐라 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아빠는 생산수단이 없거든, 그래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돈을 버는 거야. 하지만, 엄마는 ‘아빠’라는 생산수단을 갖고 있기 때문에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된단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건지..)
“응, 알겠어.”
뭐? 알겠다고? 아이는 정말 알아들은 걸까. 어려운 단어가 등장하긴 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자본이 없으니,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재화를 얻을 수 있다. 노동력을 제공하는 장소가 회사이니 매일 출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 곳은 자본주의 사회니까.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런 아내에게 크게 불만을 갖지 않는다. 그러니 아내는 자신을 신격화하지 않는다. 나도 생산수단을 권력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나와 아내는 서로 믿고 의지하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 집은 참으로 평화로운 ‘민주주의’ 사회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가 아이의 질문을 가로챈다. 그러고는 아이에게 아빠가 왜 아침마다 회사에 가는지 이렇게 설명했다.
“너희도 아침마다 어린이 집에 가지? 아빠도 그런 거야. 아빠한테는 회사가 어린이 집이거든.”
와.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아이는 이번에도 왜 엄마는 회사에 가지 않는지 물어본다. 왠지 나도 내심 아내의 답변이 궁금해진다.
“음... 엄마는 너희들 데리러 가야 하니까, 엄마 대신 아빠가 회사에 가는 거야.”
세상에. 역시 엄마는 엄마다. 아이의 눈높이 맞는 설명이었다. 쉽게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상대의 언어로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뿐 본인 위주로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당연히 상대도 알 것이라 착각하는 ‘지식의 저주’에 빠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상대의 입장에서 답변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번 책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1>은 ‘아빠가 회사에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엄마의 설명 같았다. 친절하다.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까지, 결코 얕지 않은 지식을 넓고 쉽게 설명해준다. 작가의 배려가 고마운 책이다.
아이의 질문에는 답해주는 것이 좋다. 사실 아이가 알아듣지 못해도 괜찮다. 어렵게 설명해도 일단은 진지하게 대답해주는 편이 낫다. 부모의 답변을 통해 아이는 자신이 존중받고 있음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할 수 만 있다면 아이의 입장에서 쉽게 설명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아이가 궁금해하는 그 순간이 바로 지적으로 성장하는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해소했을 때 비로소 아이는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렇게 아이는 또 한 뼘 자라난다.
그러니 세상이 궁금하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나는 운이 좋았다. 이번 책처럼 친절한 선생님을 만났으니 말이다. 질문이 두려워지는 이유는 답변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을 늘어놓기 때문에 귀를 닫게 되는 것이다. 이번 책으로 인문학적 소양이 한 뼘 자라났다면, 이제 좀 더 깊은 고민을 해볼 차례다. 우리는 왜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지적 대화는 왜 필요한 것일까?
세상은 복잡하다. 서로 다른 피부색, 종교,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각자의 이익을 위해 바쁘게 살아간다. 특히,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경계에서는 첨예한 갈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1>은 세상을 이해하는 요령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큰 줄기에서 흐름을 살피고, 복잡한 세상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해서 세상을 설명한다. 또한 맥락에 따른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설명해주기 때문에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왜 지금의 역사가 만들어졌는지 조금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부 독자 중에는 극단적인 단순화가 편협한 시각을 조장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책에서 누누이 얘기했듯이, 이러한 설명방식은 복잡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취지일 뿐이다. 회사가 어린이집 같다고 설명하는 것이 아이의 입장에서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그저 하나의 설명방식일 뿐이다.
이 세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어느 한 가지 원리로 작동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옳은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틀렸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이념과 수단은 언제나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작가가 말하는 ‘지적 대화’를 나눠야 한다. 대화라고 해서 꼭 실제로 상대와 말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을 읽으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충분히 지적인 대화다. 책과 내가, 작가와 내가 나누는 대화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내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독서야 말로, 진정한 지적 대화가 아닐까?
먹고살기도 벅찬 요즘이다. 오로지 앞만 보며 달리는 경주마 같은 이들에게 곁눈질은 사치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은 자기 계발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잠시 멈추어 주변을 둘러보고, 고개를 돌려 지나온 발자국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어떤 역사를 겪어왔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복잡한 세상이지만,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단순화도 해보고, 상대의 입장에서 원인 관계도 따져보며 세상과 대화를 나누는 노력 말이다. 이러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나도 당신도, 분명 어딘가에는 속해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찬가지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1>은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어쩌면 이러한 내 작은 고민들이 모여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 위 글은 책의 내용을 옮겨적고,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