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산문 65.]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 _ 빌 설리번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레스토랑. 여기 한 연인이 있다. 심각한 얘기를 나누는 것 같더니 이내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뭐라고?”
충격적인 소식으로 분노에 휩싸인 그는 눈빛부터 달라진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순간, 여자는 간절한 표정으로 남자의 팔을 붙잡는다.
“가지 마. 제발 이러지 마. 이러는 거, 너답지 않아”
“이거 놔. 나다운 거? 그게 뭔데? 똑똑히 지켜봐 둬. 나다운 게 뭔지!”
뭐지? 한창 재밌어지려는 찰나 자막이 올라간다. 드라마에서 흔히 쓰는 뻔한 전개 기법, 즉 클리셰 중 하나다. 드라마는 다양한 장치를 통해 주인공의 성격, 가치관을 만들어간다. 옷차림새부터 걸음걸이, 말투, 표정 하나까지 주인공답게 만들어 낸다. 상대역이 배신이라고 할라치면 ‘그래. 저 사람은 왠지 저럴 것 같더라니까’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요즘 배우들은 연기를 참 잘한다. 어쩌면 저렇게도 새로운 캐릭터를 척척 만들어내는지 감탄할 뿐이다. 나는 아직 나답게 사는 것도 뭔지 잘 모르겠는데 말이다.
당신의 첫인상은 어떠한가? 취업이나 소개팅 같은 중요한 자리뿐 아니라 가족모임, 친구의 친구를 소개받는 자리에서 조차 첫인상은 중요하다.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의 뇌가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에 사실 어쩔 도리가 없다. 뇌는 불확실성은 싫어한다. 어떻게든 연관성을 찾아내고, 기어이 예측하고야 만다. 그리고 자신의 예측과 비슷한 부분 위주로 보고 듣고 판단하려 한다. 어지간해서는 그 주장을 바꾸려 하지도 않는다. 뇌라는 녀석은 사실 고집불통에 편향 덩어리다.
그래서 우리는 결론내기를 좋아하나 보다. ‘독서를 좋아한다니 똑똑하겠지? 명문대를 나온 사람은 성실할 거야. 술을 좋아한다니 사람은 진국이겠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근거로 서로를 판단한다. 하긴 그것이 뇌의 생존에는 유리할 수 있다. 상대에 대한 관찰과 고민의 에너지를 줄여주니까. 우리는 어느새 상대의 ‘상대 다움’을 규정해버렸다. 이는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착각한다.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는 모두 ‘내가 나답게 살고 있다’고 믿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원래 고기를 좋아해. 나는 원래 책보다는 영화가 좋아. 나는 원래 그래.’ 왠지 이쯤 되면 한 마디 해줘야 할 것 같다. 이왕이면 멋진 남자 주인공처럼 눈썹 하나쯤 추켜올리면서 말이다.
“훗, 나다운 거? 그게 뭔데? 난 사실 나를 몰라.”
우리는 모두 DNA의 노예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당신이 만약 브로콜리를 싫어한다면 그것은 DNA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당신은 비위가 약한 게 아니다. 오히려 남들보다 더 뛰어난 미각을 가진 것이다. 당신은 혀에 맛을 느끼는 맛 봉오리가 많을 뿐 아니라, 쓴맛을 더 잘 느끼는 미각 수용기를 만드는 TAS2R 유전자 변이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지금이 수렵채집 사회였다면 분명 당신은 남들보다 생존하기 유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유전적 변이는 쓴맛이 너무 강한 음식을 구역질 반사로 토해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이는 잠재적 독성을 가진 식물로부터 당신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것이다. (애석하게도 지금의 사회는 브로콜리를 삼키는 편이 당신을 보호하는 데 더 유리할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 변이는 유성생식이라는 진화적 장점 속에서 발전되었다. 적게 먹어도 많은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는 유전적 변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룩한 성과임에 분명하지만, 몸과 달리 세상은 너무 빨리 변했다. 그 사이 우리는 먹을 것이 풍족해도 너무 풍족해졌다. 이러한 DNA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너무 많은 에너지를 비축할 수밖에 없다. 결코 그들이 게으르거나 의지력이 약하기 때문에 뚱뚱한 것이 아니다. 가엽게도 그들은 그저 DNA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물려받은 DNA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인정 하자니, 왠지 씁쓸하다. 자유의지가 사라진 채로 그저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닌지 암담한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다.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DNA는 바뀌기도 한다. 태아 프로그래밍, 어린 시절의 환경, 미생물총, 스트레스, 약물, 그리고 운동과 식습관으로 DNA를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엄마 뱃속이나 어린 시절의 환경은 이미 나에게 선택권이 없다. 내 부모를 내가 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래도 내 아이는 그나마 좋은 DNA를 만들어 줄 수 있으니 얼마나 희망적인가!) 어른이 된 우리가 DNA를 바꿀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바로 먹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 몸에 기생하는 수많은 미생물의 종류가 달라진다. 우리 몸이 미생물과 떨어져 살 수 없는 운명이다. 멸균 상태에서는 면역이 극도로 약해지기 때문에 외부 세균에 의해 금방 죽을 수밖에 없다. 미생물과의 동거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차라리 우리에게 유리한 미생물을 가득히 배양해서 싣고 다는 게 좋지 않을까? 운동은 역시나 DNA에 좋은 영향을 준다.(그리고 역시나 하기 싫다.) 스트레스와 환경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다양한 사람과 만나면서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내가 물려받은 DNA를 개량해서, 더 좋은 DNA를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 더 나은 인간 DNA를 만들고 물려주는 것, 그것이 ‘이기적 유전자’인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다.
우리가 DNA의 노예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하는가?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먼저, 개인적인 차원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DNA는 자랑거리가 아니다. 반대로 원망할 필요도 없다.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라, 그것을 물려준 부모에게 감사할 일이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건강한 몸과 마음이, 그리고 지금의 성공과 발전이 전부 내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으로 충분하다.
DNA처럼 이러한 혜택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운의 영역이다. 반대로 자신이 물려받은 유전자가 형편없다고 해서 부모를 원망할 필요는 없다. 당연히 내 잘못이 아닐뿐더러, 부모의 잘못도 아니다. 불리한 상황이라면 원망이 아니라 희망해야 한다. 우리는 후성유전학과 미생물총, 운동과 식습관, 생활방식으로 상당 부분 바꿀 수도 있다. 특히, 임신기간만이라도 약물과 알코올 멀리하고, 건강한 식단과 안정적인 환경으로 스트레스를 잘 관리한다면, 생각보다 훌륭한 유전자를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을 너무 비난할 필요도 없으며, 반대로 자신을 너무 추켜세우지도 말아야 한다. 어쩌면 DNA의 힘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DNA의 힘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범죄자들, 그리고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회적 약자들을 DNA를 기반으로 생물학적 차원에서 다시 돌아봐야 한다. 혹시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DNA에 새겨져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태아 시절, 그리고 어린 시절이 폭력으로 얼룩져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들은 성장하는 청소년기에 운동이나 자연환경에서 적절한 천연 도파민을 얻지 못해 약물과 폭력에 중독된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DNA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상처는 DNA에 흉터처럼 기록되며, 그렇게 상처를 입은 자들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내는 악순환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들이 어른이 되어 범죄를 저지르기를 기다렸다가 처벌할 것인지, 아니면 아직 아이일 때 범죄에 빠져들지 않도록 도울 것인지. 나는 이번 책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에서 뜻밖에도 공동체의 희망을 발견했다. 개인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작은 DNA가 가진 거대한 힘을 믿어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할 수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는 못하는 그 상처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몸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