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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가장 Sep 17. 2023

버냉키는 왜 이 책을 썼을까?

벤 버냉키의 21세기 통화 정책

  엄청난 책이다. 내용을 논하는 게 아니다. 두께가 엄청나다. 글자 크기도 작아서 그 분량이 어림잡아 어지간한 책 2권과 충분히 맞먹을 것이다. 내용의 수준을 평가하기는 곤란하다. 나 자신은 이쪽 분야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학 전문가가 아닌 내가 봐도 이 책은 분명 '전문 서적'에 가깝다. 제목부터 “21세기 통화정책”이지 않은가? 그것도 무려 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이하 연준) 의장이면서 노벨 경제학상을 받으신 “벤 버냉키”가 쓰셨으니 말이다. 우리 같은 입장에서는 이런 분이 이런 책을 써 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일 수도 있지만, 버냉키 자신은 왜 이 책을 쓴 걸까? 이미 학술분야에서 최고 경지에 이르신 분이, 굳이 이렇게 두꺼운 책을 펴내신 이유가 뭘까? 본인은 이미 닳고 닳도록 아시는 내용일 텐데, 굳이 책으로 펴내신 이유가 있었을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어렵디 어려운 경제학 지식이 아니라,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이 책은 쉽지 않다. 버냉키 본인은 대중의 입장에서 쉽게 풀어썼다고 했지만 어려웠다. 노벨상까지 받으신 최고 경제학자 입장에서야 경제학 이론이 구구단처럼 쉬운 얘기일지 몰라도, 이제 막 숫자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는 나 같은 입장에서는 곱셈은커녕 1부터 10까지 그저 숫자를 세는 것만으로도 벅찰 따름이었다. 그래도 '버냉키'님께서 배려는 있으셨다. 중요한 개념은 반복적으로 설명해 주신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1장이다. 1장에서는 연준의 등장과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연준의 역사는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지루하지 않았다. 특히, 버냉키는 연준의 입장에서 어떻게 연준이 생겨났고, 언제, 왜, 어떤 일을 해왔는지 시간의 흐름으로 풀어놓는다. 물론, 연준과 경제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는 분이라면 훨씬 더 재밌을 테지만, 나처럼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재밌는 포인트가 제법 있다.(특유의 미쿡식 유머도 종종 등장한다) 1장은 연준의 역사다. 특히, 자신이 역임하기 전까지의 내용을 드라마처럼 흥미롭게 펼쳐놓는다. 이야기가 재밌으려면 어느 정도 과장을 해야 하겠지만, 버냉키는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설명한다. 연준이 잘한 점만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하고 잘못한 점도 있는 그대로 꼬집는다. 역대 연준 의장의 실수와 잘못을 자신의 견해를 근거로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그래서 믿고 읽을 수 있었다. 균형 잡힌 시선이라서 믿음이 갔다.


  사실 이 책 이전에는 연준의 의장인 ‘버냉키’는 물론, 연준이 뭘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좀 더 솔직해지자면, 연준이라는 기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이 책 “21세기 통화 정책” 덕분에 적어도 연준이 뭘 하는 곳인지는 알게 되었다. 연준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를 줄인 말이다. ‘은행의 은행’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할 것 같다. 가계와 기업이 은행에 저축을 하고 대출을 받기도 하듯, 연방의 은행들은 연준을 통해 자금을 융통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연방준비제도(연준, Fed, Federal Reserve System)이고, 연방준비제도 안에 속해있는 이사회(FRB, Federal Reserve Board)와 12개 연방준비은행이 함께 논의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Federal Open Market Committee)로 구성된다. 연준과 연준이사회 그리고 연방공개시장위원회는 각각 독립적으로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복잡해진다. 그래서 나는 이를 구분 없이 그냥 ‘연준’ 하나로 이해하기로 마음먹고 그저 꾸역꾸역 책장을 넘겼다.


  연준의 가장 큰 역할은 경제가 망하지 않게 미리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설립 초기에는 자국 경제에 국한되었지만, 이제는 전 세계 경제로 그 영향력을 확장했다. 무역이 시작되면서부터 사실 경제는 이미 글로벌했다. 중동의 오일쇼크가, 멕시코의 경제위기가 그들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실제로 연준은 각국의 경제위기에서 주변국의 지원을 요청하거나, 직접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전 세계적 경제 위기를 미리 예방하거나, 혹은 짧은 기간 안에 정상궤도 올려놓기도 했다. 나는 여기서 버냉키가 이 책을 쓴 이유를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경제의 연결성이다.


  경제는 연결되었을 때 비로소 작동한다. 경제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되었을 때, 각국과 연결되어 있을 때 그 가치를 지닌다. 경제는 곧 연결이다. 경제는 태생부터 상호 연결이 그 속성인 셈이다. 이런 특성 덕분에, 경제는 우리 생활 곳곳에 이미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경제는 이미 너무 많은 변수에 의해 영향을 주고받는다. 특히, 우리 생활에 밀접한 경제는 바로 '물가'다. 흔히, 물가 상승이라고 불리는 ‘인플레이션’이 그나마 경제용어 중에는 익숙한 녀석일 것이다. 물가가 미친 듯이 오르면, 다시 말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경제가 활성화되어 좋을 것만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물가는 오르는데, 실업률이 낮으면, 임금도 치솟게 되고, 이는 다시 물가 상승을 가속화한다. 이게 한 나라에 국한되면 그래도 문제가 덜하지만, 문제는 우리 경제가 이미 ‘글로벌’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똑같은 빅맥이 미국에서는 5천 원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계속된 인플레이션 덕분에 50만 원이라면 어떻겠는가? 당연히, 수입해서 먹는 편이 싸고 이득일 것이다. 이런 원리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통화가치가 하락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수출은 부진해지고, 수입이 활성화된다. 같은 가격이면 수입하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자국 내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게 되어 심한 경우 나라가 파산하게 되는 것이다. 나라가 망하는 첫 징후가 바로 높은 인플레이션인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수출이 주력인 나라에서는 인플레이션을 특히 신경 써야 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대통령과 정치인들, 그리고 중앙정부에서도 늘 “물가 안정”을 괜히 최우선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연준의 역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연준은 경제가 파탄 나지 않도록 관리한다. 물가안정 즉, ‘낮은 인플레이션’을 달성하도록 계획하고 예방하고 조치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사용하는 연준의 도구가 바로 ‘금리’다. 연준은 과도한 인플레이션이 예상될 때 통화긴축정책을 펼친다. 다시 말해 금리를 인상하는 것이다. 금리를 인상하면, 시중의 자금이 은행으로 흘러 들오게 되어 활활 타오르던 경기가 사그라들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경기가 좋지 않을 땐 통화완화정책을 쓴다. 금리를 낮추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너도나도 대출을 받아 차를 사고 집을 사려 할 것이다. 대출 이자가 싸니까 말이다. 기업들 역시 은행 자금을 통해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수도 있게 되어 새로운 고용이 창출되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실업률도 줄어들게 된다. 경기가 좋아진다. 하지만, 경제는 이렇듯 간단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요즘의 경제는 더욱 그러하다는 것 역시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경제의 기본원리뿐 아니라, 예외적인 사례까지 이 책 한 권에 모두 담겨있다.


  그런데, 연준은 인플레이션 징후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그것도 전 세계적 경제상황을 어떻게 일일이 다 분석하는 걸까? 다양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징후들을 어떤 지표를 통해 판단하는 걸까? 나는 이 책이 그 점도 궁금점도 풀어주길 바랐다. 헛된 기대였다. 대신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경제가 한두 가지 변수에 의해 단순하게 작동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과와 공대를 나온 나는 문제를 만났을 때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비록 원인 변수가 다양하다 한들, 그것은 유한한 것이며, 언제라도 같은 조건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해 왔다. 예를 들면, 교량의 붕괴원인은 설계적, 시공적, 관리적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중 설계적 원인은 설계조건의 오류, 안전율의 과소 등이 있을 것이며, 시공적 원인과 관리적 원인도 마찬가지로 정해진 요인이 언제나 비슷한 양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경제는 그렇게 작동되는 것이 아니었다. 앞서 내가 말한 물가 상승이나, 금리의 영향은 말 그대로 일반적인 조건에서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과거에는 저런 이론이 먹혔을지 모르지만, 세상이 변하면서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 자체가 달라지기도 한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다. 뉴턴 물리학이 양자영역에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경제는 미지수와 정답이 일대일 매칭으로 정해진 방정식처럼 작동되지 않는다. 이것 역시, 이 책을 통해 얻은 성과라면 성과다. 경제는 전형적인 복잡계인 셈이다. 그리고 복잡계에서는 연결과 소통이 기본이다. 정치적으로는 독립성을 보장받되, 이는 고립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소신을 밀고 나가려면 지원군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지원군은 대통령이나 일부 정치인으로는 부족하다. 대중의 지지가 필요한 것이다. 버냉키는 비록 의장직을 물러났지만, 연준이 대중과의 소통을 원했기에 이 책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연준은 어떻게 경제를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을까? 말로는 금리를 올리고 내리는 것이 간단해 보이지만, 적절한 시기에 적당하게 금리를 조정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연준처럼 전 세계적인 영향을 가진 기관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버냉키는 이 책을 쓴 것 같다. 경제가 너무 많은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말이다. 일반 대중들도 좀 알라고. 전 세계 경제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경제의 흐름을 좀 알라고 말이다. 이를 통해 연준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좀 알아줬으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버냉키가 단지 하소연을 하려고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경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연준의 결정을 지지하고 따라준다면, 연준이 하는 일이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버냉키는 대중과 소통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대통령이나, 각국의 경제수장, 그리고 상원의원들 뿐 아니라, 언론과 대중과 더 많은 소통을 하고 싶어서 이 책을 쓴 것은 아닐까?


  버냉키 이전의 연준 의장인 마틴, 번스, 볼커, 그리고 그린스펀은 연준을 이끌어오면서 연준을 독립적인 기관으로 운영해 왔다. 특히, 그린스펀은 마틴과 유사한 방식으로 연준을 이끌었다. 신뢰를 바탕으로 독립성을 지켜낸 것이다. 번스와 볼커가 어느 정도 정치에 끌려다닌 것과는 달리, 그린스펀은 연준의 독립성을 지키면서 정치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린스펀은 연준의 정책으로 ‘골디락스’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골디락스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만큼 과열되지도 않고, 경기 침체를 우려할 만큼 냉각되지 않은 상태'를 일컫는 말로써, 인플레이션 압력이 조성되기 전에 미리 방지하여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 동력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을 말한다. 지난날, 마틴이 취했던 방식, 즉 파티가 과열되기 전에 칵테일 잔을 치우는 조치와 유사하다. 그린스펀은 이러한 기조를 바탕으로 인플레이션을 꾸준히 관리하였고, 결국 성공했다. 이를 통해 연준의 신뢰는 높아졌고, 독립성 또한 더욱 보장받을 수 있었다. 독립성은 신뢰를 바탕으로 얻어낼 수 있으며, 신뢰는 곧 실력에서 시작됨을 책에서 소개된 '연준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연준의 역사'에서 경제가 정치를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치인들, 즉 대중의 표를 먹고사는 정치인 입장에서는 경제 역시 인기몰이의 수단에 불과했다. 실제로 버냉키는 2009년 국회에서 경제 부양을 위한 정책에 대해 심한 공격을 받았다. 공화당의회 대표단은 노골적으로 버냉키가 제출한 경기부양책을 비판했다. 민주당이 백악관을 장악하는 동안 경제가 회복되는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아마도, 그들은 민주당이 집권할 때 경제가 망가져주어야 정권교체의 구실이 될 것이기 때문일 것이며,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 경기가 부양되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이런 역경에서 버냉키는 좌절하는 대신 유연한 사고를 한다. 연준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정치인에게 로비하는 방법이 더 손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버냉키는 이러한 정치적 경정에서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바꾸게 된다.


  2009년 3월 버냉키는 연준 의장으로서는 드물게 직접 TV 방송에 출연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각종 언론과 타운홀 미팅에 자주 출연하게 되었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강의 내용을 모아서 짧은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처럼 버냉키의 유연한 사고 덕분에, 연준은 국회가 아닌 대중 앞에서 정보를 공개하고 시장의 기대치를 안내함으로써 연준이 일반 대중에 미치는 정책의 효과를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쩌면, 이 책 역시 버냉키의 “유연함의 힘” 덕분에 우리가 만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경제는 어렵다. 하지만 경제는 우리 생활에 밀접하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를 이끄는 리더 중의 리더가 바로 연준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준을 알아야 한다. 연준의 목적, 의도, 그들의 고민과 계획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 이 책이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 연준을 통해 이해하는 세계 경제,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이라니! 이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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