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하루를 보낸 날이 더 불행했던 이유
힘든 날이었다. 종일 분주히 뛰어다녔다. 준비한 자료를 보여주고, 취조하듯 묻는 질문에도 상냥하게 답변드리려 애를 썼다. 회사를 대신해 외부 기관의 점검을 받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 신경이 예민해진다. 자료를 준비하고, 일정을 점검하고, 의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차공간까지 미리 확보해 둔다. 행여나 내 실수 때문에, 또는 부족한 준비 때문에 회사가 나쁜 평가를 받지는 않을는지 싶어서다. 나는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며 이번 점검을 준비했다. 이번 점검은 내가 주관했다. 그래서 나는 온종일 긴장한 상태로 보낼 수밖에 없다. 점검이 끝나고 점검단을 배웅한 뒤 사무실에 돌아와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한 겨울에 셔츠가 땀에 흠뻑 젖은 것도 알아차렸다. 마치 결승점을 통과한 마라토너터럼 털썩 주저앉았다. 후... 드디어 끝났구나.
이처럼 최선을 다한 날에는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 싶다. 스스로 준비한 일을 잘 마친 날이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고된 하루를 보냈으니, 빨리 누구라도 와서 위로하고, 인정하고, 칭찬하란 말이다. 내가 다 받아줄 테니!" 잘했다는 칭찬까지는 아니어도 좋다. 그저 수고했다고, 그동안 준비하느라 또 오늘 하루 점검을 받느라 얼마나 고생했느냐고 내 노력을 공감해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직장은 가족이 아니다.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는 순간, 머릿속으로 찬바람이 훅 불어온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여긴 회사지. 내가 뭘 기대한 거냐?'
나는 그제야 이유를 알았다. 고된 하루를 보낸 날일수록 내가 왜 더 불행했는지, 왜 더 쓸쓸해했는지 말이다. 온종일 고생했으니, 이제 행복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생한 만큼 보상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보상을 동료나 지인이 전하는 인정으로 채우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렇듯 내 기대를 가볍게 비웃는다. 현실은 기대와 다르다. 그들은 내 노력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정작 본인들도 자신의 일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리라. 내 업무가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들의 응원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큰 바람이었을 것이다. 결국, 고된 하루를 보낸 날일수록 나는 불행했던 것이다. 노력에 대한 보상은커녕 내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조차 드문 현실 속에 외롭고 괴로웠을 것이다.
외롭고 쓸쓸한 밤이었다. 그래도 자야 했다. 출근을 해야 하니까. 출근길에 유튜브를 뒤적거리다가 한 영상을 발견했다. '어른의 일기'라는 제목이었다. 무려 20년 넘게 일기를 써온 자타공인 '일기 장인'이라는 '김애리 작가'의 '세바시 강연'이었다. 출근길이었기에 별 기대 없이 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작가가 나를 위로해 주었다. 작가는 내가 그동안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왜 그렇게 외로웠는지 알려주었다. 어쩌면 그 작가의 강연을 듣고 내가 깨달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작가는 일기를 오랜 시간 써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기를 쓰는 동안 나는 또 다른 내가 되어 나를 관찰하고 보살피고, 돌봐준다.
일기를 통해 자신이 듣고 싶은 얘기를 직접 해주면서 스스로 큰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내가 남한테 받고 싶은 인정, 위로, 공감을 남이 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본인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위로하며, 공감해 주면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했다. 이렇듯 일기를 통해 자신의 행복을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신이 만들어 가라고 했다.
순간 어제의 쓸쓸함이 해결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 행복을 위해서 더 많은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러자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라고만 믿어왔다. 나는 남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다. 좋아해 주길 바랐다. 공감해 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기해 했던 것이다. 타인을 통해 존재감을 느끼고 안도감을 찾으며, 이를 통해 행복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다. 내 행복의 주도권을 내가 아닌 남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늘 외롭고 불안했던 것이다. 행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내가 해줄 수 있는 그 이상을 해주려 애를 썼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이 내 곁에 머물기를, 내게 사랑한다 말해주기를, 적어도 내게 고생한다고 인정해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때문에 나는 나를 별로 돌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나보다는 남을, 더 정확하게는 '남이 생각하는 나'를 더 신경 썼기 때문에, 내 감정 역시 남에 의해 좌우되기 일쑤였다. 돌아보면 그랬다. 온종일 분주히 최선을 다했던 날도 괜스레 서글펐던 날이 많았다. 어쩌다 온전히 쉬는 날에도 마음이 불편했었다. 이제 나는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어렵다. 나는 지금 외로운가? 행복한가? 피곤한가? 지친 건가? 모르겠다. 주변에서 그저 힘내라면 힘을 냈고, 좀 쉬어도 된다고 하면 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나도 수년 째 일기를 써왔다. 하지만, 내 일기는 기록이었고 다짐에 가까웠다. 그날의 주요한 일들, 성과들,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기억하고 싶은 내용을 중심으로 적었다. 더 많은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내일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더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기록했다. 나는 이제 막 ‘김애리 작가’의 <어른의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불과 몇 페이지를 읽지도 않았지만, 변화가 생겼다. 적어도 이제부터라도 ‘나를 위한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행복의 외주화를 이제 끝낼 때가 온 것 같다. 내 행복은 이제 내가 결정하려 한다. 남한테 듣고 싶은 말을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 해도 이제 괜찮을 것 같다. 내가 해주면 되니까.
아무도 네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속상했구나. 아픈 하루였지? 지친 날이었지? 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 내가 잘 알지. 다른 건 몰라도 너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잘 살아낸 거,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 <어른의 일기> 중에서 -
나는 이 부분을 읽고 결국 감정을 누르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 고스란히 책이 담겨 있었다. 나는 책이 건네는 위로에 용기를 얻었다. 고된 하루를 보냈던 그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따뜻한 위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정한 공감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나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아니, 서글픔을 넘어 억울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제길. 말이라도 좀 다정하게 해 주면 안 되나?'라는 생각 했었다. 나는 그날 들은 그 짧은 강연을 통해 깨달았다. 그 '다정한 말'을 이제부터라도 내가 나한테 해주자고. 일기를 통해서, 글쓰기를 통해서 어쩌면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질 것만 같다. (이 자리를 빌려 '김애리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읽기 시작했지만, 천천히 대화하며 읽어보겠습니다. 책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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