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냥 산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가장 Feb 17. 2024

화를 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지난주 나는 직장 동료에게 화를 냈다. 평소 그와 나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편한 사이다. 고된 직장생활에서 그나마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난 게 다행이라 여길 정도였다. 그와 나는 회사얘기, 친구얘기, 때로는 속마음까지 주고받으며 가깝게 지냈다. 그런 그에게 오늘 나는 화를 냈다. 그와 차분히 대화하며 해결해 보려 참고 참았지만,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내 속마음은 얼굴에 그대로 비쳤다. 화가 가득 찬 얼굴은 종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편했던 사이가 한순간에 멀어졌다. 불편해졌다. 손에 꼽힐정도로 친했던 사이였건만, 하루아침에 가장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사건의 시작은 ‘사내 교육’이었다. 우리는 본사에서 근무한다. 그렇다 보니, 사업소 직원을 상대로 종종 교육을 하기도 한다. 교육이라고 해서 전공책을 강의하는 것은 아니다. 본사에서 새롭게 진행하는 프로젝트나 바뀐 시스템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새로 개발한 프로그램의 매뉴얼을 설명하는 자리는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늘 해오던 업무를 알려주는 것이기에 담당자 본인이 가장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전문적인 지식을 강의해야 했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교양을 가르치는 경우는 해당 교육을 맡은 직원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평소 수행하던 업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련 자격증이 한두 개 더 있다고 해서 해당 분야의 모든 것을 알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강의 맡게 되면, 강사 역시 두꺼운 전공책을 뒤적이며 강의안을 만들고, 오랜 시간 연습한다. 행여나 잘못 가르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교육을 받으러 오는 사업소 직원들 중에는 언제나 고수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고수는 초야에 있다고 했던가? 어설프게 준비했다가는 망신을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교육 강의는 신중하게 계획되고, 강사 역시 고심 끝에 결정하는 게 보통이다.


이번에는 내가 그런 교육을 하게 되었다. 부서의 결정이었고, 회사의 방침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교육을 맡았으니 준비하면 된다. 그런데, 준비할 시간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일정은 물론이고, 강의 콘텐츠 역시 강사인 나와 조금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정해졌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본인은 이번 기획안으로 윗분께 잘 보일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막상 강의를 해야 하는 직원들은 하나같이 볼멘소리를 했다. 준비할 시간이 10일도 채 되지 않았다. 교육을 추진한 담당자는 교육을 맡게 될 직원을 배려하지 않았다.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처사였다. 강의를 맡게 된 직원들은 한 목소리를 냈다. 당사자와 조금의 상의도 없이 추진된 교육 계획이 불만이었다. 일정도, 주제도 충분히 협의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며 불만을 표현했다. 심지어 강의 때문에 미리 계획한 출장일정을 조정해야 하는 직원도 여럿 있었다. 이번 교육을 기획한 담당자인 그는 부서장의 결재를 끝낸 ‘교육 계획(안)’을 퇴근 무렵 메일로 통보했다. 심지어 일주일 줄 테니 강의안도 미리 만들어서 부서장 검토를 받으라고 했다.


교육을 맡게 된 직원들은 불만이 있으면서도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또는 아주 점잖게 얘기했다.(돌아보면, 나도 그랬어야 했다. 그들은 '직장생활'의 고수였다. 나는 아직도 수련이 부족하다는 걸 느낀다.) "화는 나지만 어쩌겠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뭐."라는 반응이었다. 그 말이 맞다. 시간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성과를 내면 된다. 하지만, 나는 내가 교육을 맡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 '과정'에서 화가 났다. 하필이면 교육 담당자가 평소 나와 친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움은 실망감으로, 실망감은 다시 분노로 바뀌었다. 메일을 열어 강사란에 내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욕이 튀어나왔다. 씨X.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쩐지 교육 담당자인 그가 나에게 빅엿을 날리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이렇게 일방적으로 교육을 맡기는 경우는 없었다. 보통은 한두 달 전부터 교육담장자가 교육을 맡을 직원을 섭외하면서, 어떤 분야를 강의하면 좋을지 서로 협의한다. 그 과정에서 교육 계획 '안'이 변경되기도 하고, 다듬어지기도 한다. 강의를 한다는 게 한두 페이지짜리 보고서를 읽고 쓰는 일이 아님을 서로 잘 알기 때문에, 미리 이렇게 협의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회사에서 말하는 ‘업무협의’이자, 동료를 향한 ‘배려’다.


나는 무시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나를 배려하지 않았고, 존중하지 않았다. 이번 교육계획서 역시 하루아침에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몇 주 전부터 기획했을 것이고, 어쩌면 한 달 전에 초안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때라도 말해줬어야 했다. 나에게 강의를 부탁하려 하는데 괜찮겠느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농담을 주고받고, 업무적인 협의를 했음에도 왜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회식을 한다고 해도 ‘저녁에 시간이 되는지? 무엇이 먹고 싶은지?’ 미리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화가 났다. 그리고 결국 화를 내고야 말았다. 그랬다. 나는 교육을 맡은 다른 동료들과 달리 그 담당자에게 결국 쓴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느냐고,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그동안 왜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정말 나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그런 것이냐고, 대체 왜 그랬느냐고.." 나는 말을 하면서도 부들부들 떨렸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참으며 그래도 나름 단어를 골라가며 얘기를 했다. 하지만, 결국 언성은 높아졌고, 표정은 일그러졌다.


나는 화를 냈다. 하지만, 화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나에게 쓴소리를 들은 그 역시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평소 믿었던 내가 자신에 화를 내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대신,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를 먼저 꺼냈다. 나는 그저 핑계처럼 들렸다. 내 반응이 별로인 걸 알아차렸는지, 그 역시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나보다 직급이 낮아서 그런 거냐? 부장님이 하라 했어도 이렇게 서운하다고 했을 것이냐?'며 억울해하기까지 했다.(물론, 그가 아닌 부장님이 이런 식으로 교육을 맡겼다고 한다면, 이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와 부장님은 나와 그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쌓인 게 많았는지, 쉬지 않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던 중 자신 역시 이렇게 당한 경우가 있었다며, 그때는 왜 자신과 상의 없이 일을 떠맡겼느냐 되려 따지며 달려들었다. 기가 막혔다. 화를 낸 나부터 잘못이지만, 화를 화로 대응하는 그의 처신에 또 한 번 실망했다. 믿었던 동료였는데, 신뢰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만약 그가 "많이 당황하셨죠? 죄송합니다. 미리 상의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이러이러한 사유가 있었습니다. 이번 한 번만 저를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시간이 부족하긴 하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만약, 그가 이런 반응이었다면, 나도 이처럼 화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쩔 수 있느냐며, 지금이라도 열심히 해보자며 동료애를 발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억울해했다. 아니, 나를 조롱하는 듯 비아냥 거렸다. "에효~ 그래요, 누굴 탓하겠어요. 다 제 잘못이지, 제가 다 미안한 걸로 하시고, 화 푸세요~" 나는 그의 마지막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할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사과도 반성도 아니다. "부장이 결재했으면 할 것이지, 왜 담당자한테 와서 지랄이냐"는 훈계였다. 사과의 기술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화해는 화난 이유에 맞는 설명을 들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심지어 그게 그저 ‘미안합니다’여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화를 내는 상대의 입장에서 화난 이유를 함께 고민해 주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화해 역시 배려에서 출발해야 한다. 화를 낸 상대를 면전에 두고 “내가 더 기분 나쁘거든?”이라는 식의 공격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도무지 답을 모르겠을 땐, ‘많이 속상하셨겠네요. 힘들어서 어떡하죠?’ 정도만 반응해 줘도 화를 낸 사람이 멋쩍어지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화를 냈고, 그 역시 나에게 화를 냈다. 그러니까 그날 우린 서로 다퉜다. 그와 나는 구내식당에서 같이 점심도 먹는 사이였지만, 그날은 얼굴도 쳐다보기 싫었다. 나는 강의가 아니더라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야근을 했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갔다. 너무 피곤했지만, 밤잠을 설치고 말았다. '왜 내가 무시를 받아야 하는 걸까?'에서 시작한 물음은 밤잠을 밀어내며 새벽까지 이어졌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그는 지금 어떨까? 그 역시 힘들겠지?' 아마도 이 질문에 도달했을 무렵 선잠에 든 것 같다. 내 억울함, 내 화에 가려져 그 역시 힘들 거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밤새 뒤척이며 그날을 돌이켜봤다. 화를 후회했다. 화를 냈던 나 자신이 싫었다. 자괴감이 들었다. 화는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화 때문에 나는 내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했다. 이런 내 모습에 그 역시 화가 났을 것이다. 화를 내서 이긴다 한들, 그가 무릎이라도 꿇고 잘못을 뉘우쳤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겨서 무엇하고, 졌으면 또 무슨 상관이란 말이가? 그날 나는 화를 내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화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기 시작했다.


밤잠은 설쳤지만, 나는 일어나자마다 노트부터 펼쳤다. 그리고 강의를 어떻게 꾸며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하나둘 적어나갔다. 어느새 노트 한 페이지가 강의 관련 아이디어로 채워졌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내가 화를 낸 이유는 믿었던 그를 향한 실망감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강의가 두려웠고, 그걸 준비하는 과정이 고단함을 알았기에,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근까지 하면서 결국은 해낼 나 자신이 짜증 났던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싫고 두려워서 화를 낸 것이었다. 


어떤 분야라도, 언제 맡기더라도 척척 강의를 해낼만한 '실력'이 아직은 없기 때문에 두려웠고, 그 두려움을 가리기 위해 화를 낸 것이라 결론짓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비난의 대상은 교육 담당자도 아니고, 그의 상사도 아닌 바로 나였다. 그날 나는 화부터 냈다. 내 두려움을 감추려고 말이다. 부족한 실력이 들통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정해진 기간 안에 준비를 제대로 못할 것 같은 두려움, 시작도 하기 전에 겁부터 집어먹어버린 내 평판이 깎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마치, 싸움을 못할수록 욕부터 내뱉는 것처럼 나는 화부터 낸 것이다.


이런 깨달음으로 나는 그에게 사과를 했다. 언성을 높여서 미안하다고, 교육을 잘 준비해 볼 테니 너무 걱정 말라고. 혹시나 필요한 게 있으면 도움을 요청하겠노라고. 그리고 다음부터는 조금만 미리 상의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제야 내 마음에 불길이 잡히는 것 같았다. 화가 두려움 때문이라면, 그리고 그 두려움이 부족한 실력 때문이라면, 해결책은 딱 한 가지뿐이다. 실력을 키우면 된다. 그러니 이건 자책이 아니다. 더 큰 동기부여인 셈이다. 분명, 이번 교육을 준비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번 교육으로 내가 날아오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전히 산재된 현안들, 부족한 실력과 제한된 시간은 성공적인 강의의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 역시 좋은 기회라 생각한다. 나는 '그럼에도' 잘 해내고 싶어졌다. 최선을 다해 준비한다면, 적어도 단 한 명, 바로 '나 자신'은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화는 풀린 것 같은데, 어쩐지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다. 엊그제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이는 분명 두려움이 아닌 설렘이리라.

매거진의 이전글 끌어안고 싶은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