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발견한 하루>
<별에서 온 그대>가 나왔을 때 이런 댓글을 봤던 기억이 난다. 하다 하다 외계인이냐고, 이젠 재벌로도 성에 차지 않느냐고. 드라마를 보는 여자들은 언제까지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왕자만 찾을 거냐는 조롱 섞인 댓글이었다. 사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전 드라마는 보통 그랬다. 여자 주인공의 사랑은 남자 주인공의 마음을, 남자 주인공의 사랑은 여자 주인공의 경제 상황을 바꿔줬다.
물론 경제 상황이 항상 마음보다 대단한 건 아닐 거다. 두 주인공이 ‘서로’의 구원자가 되는 것이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핵심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계속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 여주인공 횡재했구나!”
드라마는 매우 대중적인 매체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을 읽고, 새롭게 대두되는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바람을 담는다. 고리타분하던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도 변하고 있다. 경제 상황이 아니라 생명이나 일상생활을 두고 사투를 벌이는 판타지 드라마가 등장했고, 여성 주인공의 사회적 지위는 점점 높아졌다.
드라마 <W>는 이런 흐름 속에 등장한 작품이다. 강철(이종석 분)은 사격 금메달리스트에 엄청난 부자지만 만화의 주인공이고, 오연주(한효주 분)는 의사다. 만화 주인공이 말 그대로 ‘만화를 찢고’ 현실로 나온 독보적인 소재로 많은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여기 또 하나의 만화를 찢고 나온 주인공이 있다. 곧 방영될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주인공 하루(로운 분)다.
이 두 작품은 ‘만화’라는 비슷한 소재에 똑같이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지만 3년이라는 시간은 작품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아직 <어쩌다 발견한 하루>가 방영되기 전이지만 드라마 기획의도와 인물 소개, 트레일러 등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와 원작 웹툰 <어쩌다 발견한 7월>을 토대로 <W>와 <어쩌다 발견한 하루> 두 작품을 비교해보려고 한다.
만화 속 주인공은 작가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W>와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자신이 만화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버린 만화 캐릭터의 이야기다. 이들은 작가의 의도대로 설정된 세계에서 자유를 찾기 위해, 스스로 이뤄나가는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친다.
<W>의 주인공 강철은 극 중 만화인 <W>의 주인공이다. 올림픽 사격 메달리스트이자 세계적 기업, 방송국의 소유주인 그는 그야말로 만화 속에만 있을 법한 남자다. 만화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강철은 ‘주인공’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모두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고, 여주인공 연주 또한, 의사로서의 자신의 삶은 잊고 강철을 살리는데 몰두한다. 자신이 만화 속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무력감은 매우 컸지만, 이후 그는 만화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살아남는 데 적절히 이용한다.
반면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주인공은 만화 <비밀>의 단역인 단오(김혜윤 분)와 이름도 없는 엑스트라인 하루다. 심장병에 걸린 부잣집 소녀라는 매우 순정 만화 주인공 같은 설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짜 주인공을 위해서만 움직여야 하는 단오와 이름조차 부여되지 않은 하루의 인생은 너무나도 초라하다. 주인공이 아니라서 좋은 점은 딱 하나, 작가에게 많이 불려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다.
누구든 설정값이 있다. 외모부터 시작해 집안, 성격, 건강 등등. 내가 가진 설정값은 나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을 결정한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들이 알려주는 것은 명확하다. 태어나면서 정해진 것들이 인생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는 것. 어쩌면 인생은 내 설정값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의 연속일지 모른다.
더 나은 사람, 더 좋은 사람, 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많은 드라마의 주인공은 역경을 딛고 성장한다. 그리고 시청자에게 말을 건다. “당신도 변하고 싶지 않나요?”
학원 성장 로맨스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W>에는 없는 성장이 있다. 원래부터 주인공이었던 강철은 모를, 단오와 하루만 알 수 있는 성장법이다. 지극히 평범한 내가 주인공이 되는 법.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 나를 인정하는 것.
사실 드라마화가 확정되기 전에 웹툰 <어쩌다 발견한 7월>을 본 적이 있다. 프롤로그와 1화, 단 2화 만에 나는 이 웹툰을 끊었었다. ‘언제 적 <꽃보다 남자>야? 이런 게 아직도 나온다고?’가 나의 첫 평가였다. 그리고 이번 포스팅을 위해 웹툰을 다시 봤다. 어느새 웹툰은 완결이 나 있었다. 그리고 지난날의 내가 너무 섣불리 판단했다는 걸 알았다.
사실 엄밀히 말해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하루는 만화를 ‘찢고’ 나온 주인공은 아니다. 만화 속에서 현실로 나오는 종류의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설정이 있다. 내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 그토록 깨부수고 싶은 만화 속 세계관의 정체다.
<W>의 강철은 만화 속 세상에 딱히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주인공인 자신에게 굉장히 만족스러운 삶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은 있었지만...) 그래서 강철은 만화를 찢고 나오긴 했지만, 만화 속 세상을 부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 세상도 하나의 세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화 속 세상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만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생을 이어가도록 노력한다.
반면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단오와 하루는 만화 속 세상에 불만이 많다.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무려 단역/엑스트라 취급만 받는 이 세상은 균열을 내고 깨부숴야 할 공간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꽃보다 남자>의 세상,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가 그토록 반복해왔던 세상이다.
소수의 주인공 위주로 세계가 굴러가는 세상,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주인공의 눈에 드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던 세상, 그래서 그토록 가진 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하고, 가지지 못한 자는 아름다운 요조숙녀가 되었던 세상 말이다. 단오와 하루는 이 세상의 질서를 당당히 거부한다. 그리고 나아간다. 사랑을 위해서.
아직 첫 방송이 시작되기도 전에 작품을 평가하는 건 사실 많이 이른 감이 있지만, 그래도 이 작품을 소재로 삼은 건, 나처럼 1화만 보고, 그러니까 ‘꽃보다 남자’ 같은 줄거리와 인물 소개만 보고 이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일은 없길 바라서다. “이 드라마는 그런 드라마가 아니다! 익숙해서 지겨운, 유치한 그런 드라마 아니다!” 오해로 인해 이 드라마를 보지 않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덜 생기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 포스팅이 헛되지 않도록, 원작 웹툰 <어쩌다 발견한 7월>이 내게 줬던 감동을 드라마 또한 줄 수 있기를, 이 드라마가 이 세상 모든 주인공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