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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이 Jan 12. 2020

이것은 야구 이야기가 아니다

<스토브리그>

<스토브리그>, SBS, 2019.12.13.~, 연출: 정동윤 / 극본: 이신화




최고 시청률 14.1%를 돌파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가 원래 MBC 극본 공모 당선작이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MBC에서 제작했다고 똑같이 이렇게 흥행하리란 법은 없지만, 그래도 MBC로서는 아이유를 놓친 JYP처럼 아쉬운 마음이 들 것은 당연하다. MBC에서 <스토브리그>를 제작하지 않은 것은 이 작품이 야구를 소재로 한 ‘스포츠 드라마’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MBC로서는 요즘처럼 재기의 기회만 노리고 있는 순간에 이전에 딱히 크게 성공한 적도 없고, 꾸준히 제작되어 오지도 않았으며, 뚜렷한 마니아층도 짐작하기 어려운 스포츠 드라마를 제작하고 편성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스토브리그>를 데려온 SBS에서도 이 드라마가 단순한 ‘스포츠 드라마’ 혹은 ‘야구 드라마’가 아님을 강조하는 모양새다. 티저 포스터에서는 ‘이것은 야구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티저 예고편에서는 ‘돌직구 오피스 드라마’라는 문구를 사용해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스토브리그>가 그렇다고 야구 이야기가 아니거나, 스포츠 드라마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이 야구를 소재로 하고 있고, 그러니 스포츠 드라마일 수밖에 없다는 건 누가 보아도 부인할 수 없는 지점이니 말이다. 이쯤되면 궁금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브리그>는 왜 그렇게 스포츠 드라마와 선을 긋고 있는 것일까?



야구팬만을 위한 드라마가 아니다.

스포츠 드라마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우려 중 한 가지는, 해당 스포츠에 대한 호불호가 작품을 감상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기본적인 수요가 입증된 로맨스/멜로 계열의 드라마나 스릴러/미스터리 드라마와 달리 스포츠 드라마는 ‘스포츠’라는 것이 장르보다는 소재에 가깝고, 그렇다 보니 소재가 바뀔 때마다 그에 대한 수요 또한 변동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사실 당연한 걱정이다. 시즌마다 집에서 시끄럽게 소리를 치며 야구를 보고, 주말에는 매번 동네 야구 동호회에 나가 야구를 해야 하는 남편을 둔 아내나, 좋아하지도 않는 야구 경기를 연인 때문에 매번 경기장에 가서 졸며 관람해야 했던 사람 등 개인적인 경험으로 인해 야구를 싫어하는 사람보다는 평소 야구를 즐겨 관람하는 야구팬들이 훨씬 야구 소재의 드라마를 볼 가능성이 큰 건 당연하다.

더욱이 호불호는 소재에 대한 지식과 직결된다. 실제로 SBS에서도 드라마 방영 전 야구 시즌일 때, 야구 중계를 하며 중간중간 <스토브리그> 홍보 영상을 계속해서 틀어주는 등 야구팬을 상대로 한 홍보 마케팅을 아주 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덕분인지 매 회차가 방영될 때마다 온라인 야구 커뮤니티는 아주 난리가 난다고 한다. 기존 국내 야구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서 작중 팀과 실제 팀을 비교하고, 사례가 현실적인지 아닌지를 분석하며 드라마를 야구팬의 관점에서 200% 즐기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 당연히 <스토브리그>는 야구에 대해 잘 아는 야구팬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드라마일 거다.

하지만 경기와 드라마는 명확히 다르다. 경기는 룰을 모르면 제대로 관람할 수 없지만, 드라마는 룰을 몰라도 제대로 볼 수 있다. 드라마는 ‘갈등’으로 재미를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야구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작품을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하겠지만, 그게 없더라도 드라마는 드라마 자체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작중 인물의 이해관계를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만 그려준다면 ‘스포츠 드라마’라는 지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일반인이 드라마 몇 번 본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실제 프로의 세계는 아닐 거다. 등장인물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낼 때 나는 그 작품이 진짜 같다고 느낀다. 현실을 담아내는 것과 시청자를 이해시키는 것 사이의 균형이 중요한 것은 스포츠 드라마뿐 아니라 오피스 드라마, 의학 드라마, 법정 드라마 등 특정 직종을 다루는 작품이 공통으로 가지는 특징이다. 상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미생>을 잘 봤던 것처럼, 법적 지식이 전혀 없어도 <검사내전>을 편안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의사가 아니어도 <낭만 닥터 김사부 2>를 기다릴 수 있는 것처럼, <스토브리그>도 단순히 ‘스포츠’라는 특정 업계의 이야기를 다뤘을 뿐이다.

SBS는 이 지점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야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일반 시청자도 문제없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눈물의 감동 실화가 아니다

국내 스포츠 드라마와 영화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스포츠 소재를 더한 로맨스물과 개인 혹은 팀의 감동적인 성장물.

스포츠를 단지 사랑의 매개체 정도로 사용한 로맨스물은 차치하고서라도, 국내의 스포츠 소재 작품은 매우 주제가 한정적이다. 바람직한 스포츠의 가치인 협동, 화합, 공정한 경쟁, 노력을 통한 극복을 토대로 개인이 어떻게 성장하는가 혹은 팀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를 다룬 작품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의 주인공은 사람이다. 특정 인물을 중심에 두고, 이들이 어떻게 변화해가는지 유심히 따라가며, 결국에는 이들 작품의 공통적인 코드인 ‘감동’으로 향한다.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고 결국 승리하는, 혹은 승리에 비견할 만한 값진 성장을 보여주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토브리그>는 거의 시청자와 관객을 학습시키듯 반복된 스포츠 드라마의 공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사람의 성장을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보다, 사람이 바뀌어도 팀을 유지할 ‘시스템’에 집중한다. 츤데레적인 면모로 선수 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팀의 성적을 견인하기 위해 동료의 태도 변화를 촉진하는 리더는 여기 없다. 주인공 백승수(남궁민 분)는


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전 할 겁니다. 팀에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전 잘라내겠습니다. 해왔던 것들을 하면서 안 했던 것들을 할 겁니다.


라고 선언한다. 그에게 팀워크는 서로 돕고 위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 몫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몫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바꾸기보다 과감히 ‘잘라내’며 자기 몫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 그룹에서 팀을 해체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일 없어질 지구에다 자꾸 사과나무를 심는” 리더. 사람보다 조직의 변화를 먼저 생각하는 리더. 이런 리더는 이전 한국 스포츠 드라마에 존재하지 않았다. SBS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 드라마가 감동 성장형의 뻔한 스포츠 드라마가 아니라는 걸.



나는 감히 <스토브리그>를 한국 스포츠 작품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사실 한국뿐 아니라 해외 스포츠 작품들도 대부분 스포츠를 소재로 한 가족 혹은 로맨스 영화이거나, 팀 또는 개인의 성장을 다룬 작품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스포츠라는 소재를 풀어낸 작품은 <스토브리그>와 비교되는 <머니볼>과 <드래프트 데이>, 그리고 스릴러로 풀어낸 <폭스 캐처> 정도였다.

그동안 얼마나 같은 종류의 스포츠 작품이 쏟아져 나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수치다. 작품들이 일종의 전형적 틀을 생산하고 있었던 거다. “스포츠 영화는 이럴 것”이라는.

그런 와중에 한국에서 이런 도발적인 작품이, 그것도 공모전 당선작으로 발굴되었다는 것은 아주 고무적인 일이다. <스토브리그>가 앞으로 한국 스포츠 드라마를 더욱 다양하게 만드는 일종의 분기점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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