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도깨비>, <호텔 델루나> 전격 비교
<도깨비>
tvN, 2016.12.02. ~ 2017.01.21. 연출: 이응복 / 극본: 김은숙
<호텔 델루나>
tvN, 2019.07.13. ~ 2019.09. 연출: 오충환, 김정현 / 극본: 홍정은, 홍미란
천 년이 가도~ 난 너를 잊을 수 없어~ 사랑했기 때문에~~
얼마나 사랑하면 천 년이 가도 잊을 수 없을까. 짧디 짧은 사랑의 유효기간을 연장해가기도 벅찬 현실의 연애에서 '천 년'의 사랑은 말그대로 판타지다.
공감하라고 만든 게 아니라, 착각하라고 만든 이야기라고 했던가. (ft. 검블유 9화)
아무리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랑이라도, 드라마는 그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하리라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천 년을 살아온 도깨비와, 천 년을 살아온 귀신 호텔의 사장.
이 두 비현실적인 존재들의 삶과 사랑은 수많은 시청자들을 착각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30년의 세월도 보내보지 않은 미천한 나에게, 천 년은 모든 것이 무용해질 시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똑같이 천 년을 살아온 존재면서도 두 사람의 삶과 사랑은 매우 다르다.
마흔 이후부터의 얼굴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담긴 진짜 얼굴이라는데, 천 년이 지난 후에 남은 성격과 가치관이야말로, 정말 그 사람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2016년 겨울에 찾아온 남자와 2019년 여름에 찾아온 여자라는 점이 두 사람이 다른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무엇이 두 사람을 그리도 다르게 만들었을까.
만월(이지은 분)의 천 년은 울분과 배신감에 몸서리치는 시간들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배신, 그로 인한 가족과도 같던 이의 죽음. 만월의 분노는 자신을 막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것으로도 사그라들지 못했다.
많은 사람을 죽인 댓가로 받은 천 년의 시간이라는 벌.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줄곧 다짐한 것은 또 다른 복수였다.
자신을 배신했던 그가 환생하여 나타난다면 그를 죽이고 자신 또한 악귀가 되어 소멸하기를, 그 순간을 바라고 바랐다.
만월은 청명(이도현 분)을 사랑했다. 사랑할 수 없는 사이,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이였지만 서로의 마음을 접기 보다, 같이 살아갈 앞으로를 도모하자고 둘은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얼마 되지도 않아 현실 앞에 무참히 짓밟혔고, 사랑의 댓가로 그녀는 전부를 잃어야 했다.
사랑했던 만큼 아팠고, 그것보다 더 분노했다.
복수 앞에 거침없던 만월의 칼날은 단 한 사람, 청명 앞에서 주저했다.
멈칫하는 칼날에 한 마디의 변명도 없이 자신을 던지는 청명이 만월은 밉고, 또 미웠다. 그리고 그 앞에서 주저한 자신도 미웠다.
복수를 실행한 순간, 만월은 사랑했던 모든 시간을 도려내야 했다.
문득 생각나는 사랑했던 그의 모습은 항상 그의 차가운 말과, 자신의 칼에 죽는 마지막으로 끝났다.
사랑했던 날은 짧았고, 마지막으로 인한 벌은 영원 같았다. 자신의 복수 앞에, 그로 인해 받는 형벌 속에서 그녀가 청명과 그때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건 증오뿐이었다.
남겨진 인생이었다. 망한 나라 뒤에, 죽은 부모 뒤에, 먼저 간 연우(이태선 분) 뒤에, 그리고 자신의 복수 뒤에.
함께 였던 모든 시간을 도려내고, 다시 홀로 남은 그녀는 외로움을 받아들여야 했다.
애초부터 혼자였던 사람이 다시 혼자가 된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했다.
귀신들이 머물 여각을 운영하는 일은 지독히도 만월의 처지와 닮았다.
이미 죽은 자들 속에서, 곧 저승으로 떠날 인연 속에서 만월은 마음을 굳게 닫았다.
점점 만월의 행동은 친절, 배려, 동정 등 여타의 도덕적인 태도와 멀어졌다.
다시 아플 일 없이 철저히 외로워야 했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만월은 천 년 동안 생과 사의 경계에서 그저 있었다.
죽지 않았지만 죽은 자들과 생활해야 했고, 살아있지만 산 자들과 함께 늙어갈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춘 채로 혼자 남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사치뿐이었다.
돈을 모아 인간의 물건을 사고, 인간의 음식을 맛보고, 몸을 치장했다.
지리한 시간 동안 변하는 건 그것들 뿐이었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그녀는 새로운 것을 갈망했고, 변화하는 많은 것들로 자신을 덮었다.
긴 형벌의 끝에 만월에게 온 사람은 뜻밖에도 청명이 아니라 찬성(여진구 분)이었다.
찬성은 만월을 변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천 년 동안이나 말라있던 나무에 잎이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찬성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었다.
만월은 오랜 시간 동안 좋은 사람이길 포기했지만, 찬성이 좋은 사람인 것이 싫지 않았다.
아무리 신의 뜻이라도, 찬성을 곁에 두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찬성은 약한 사람이었다. 약한 사람이면서도, 그는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자주 위험에 처했다.
남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들었던 만월에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드는 건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만월은 찬성을 몇 번이나 놓아줬다. 남은 거라곤 외로움과 증오뿐인, 나쁜 사람인 자신에게서 도망갈 수 있도록 기회를 줬다. 하지만, 찬성은 다시 만월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곁을 지켰다.
결국 만월에게 꽃이 피었다.
사실 만월은 자주 오락가락했다. 얼른 청명을 만나 그를 죽이고 소멸되겠다 다짐하면서도, 변화가 닥쳐오자 찬성을 위험한 귀신에게 보내면서까지 호텔에 남아있고 싶어했다.
사는 게 무엇이든, 죽는 게 무엇이든 그 모두가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 된지 천 년인데도, 가끔 이대로 죽고 싶었고, 또 가끔 이대로 살고 싶었다.
그런데 꽃이 핀 만월은 비로소 사라지는 게 두려워졌다. 그토록 바라던 형벌의 끝이었지만, 지긋지긋하던 원념과 증오의 끝이었지만 이렇게 져버릴 꽃으로만 남는 것이 슬펐다.
찬성 때문에, 이제야 다시 변화하게 하고 마음을 주게 만든 찬성 때문에. 그와 헤어질 수 없어서, 그와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만월은 두려웠다.
만월은 눈물로 남은 지난 사랑을 알았다. 천 년을 기다려 다시 만난 사랑은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또 만월은 남겨진 자신을 알았다.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 자신처럼 남겨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간절해졌다. 자신에게 내려진 이 형벌의 끝이 소멸이 아니기를, 지금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멈춰진 시간이 그와 함께 다시 흐르기를.
메마른 나무에 사랑이 피었다.
김신(공유 분)의 천 년은 이별의 시간들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앞날을 가늠하는 일도 몇 번. 모든 가늠은 소용이 없었다.
반복되는 이별의 연속에서 이대로, 이대로 그는 그만 생을 끝내고 싶었다.
지키는 인생이었다. 도리를 지켰고, 신의를 지켰고, 내 사람들을 지켰고, 가족을 지켰다.
많은 피를 묻혀야 했지만 상관 없었다. 그의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그는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최선은 그의 왕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싶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충직한 부하를, 유능한 군사들을 내놓으면서까지 왕은 자리를 지켰다.
목숨을 걸고 지킨 그의 사람들은 그가 넘보지도 않은 자리를 위해 죽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죽었다.
상이라고 했다. 죽었다 살아나보니 그는 더 이상 원래의 그가 아니었다.
누구도 갖지 못하는 영생이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몸. 긴 세월 동안 쌓아놓은 부, 그리고 인간은 꿈도 꿀 수 없는 능력까지. 부족한 것 없었고, 더 이룰 것 없었다.
벌이었다. 이별은 반복되고, 반복되도 익숙해지지 않았고, 어떤 이별도 가볍지 않았다.
어떤 죽음도 잊지 못할 것이라는 신의 저주대로, 그는 모든 죽음이 아팠다.
그의 천 년은 지옥이었다. 반드시 보내야 할 인연들 속에서 그는 자유롭지 않았다.
신으로 살았다. 죽는 순간, 신은 듣고 있지 않으니 기다리지 말라고 했던 그였다.
마음 약한 신으로 살았다. 선하게 사는 이들에게 기적의 순간을 베풀었다.
기적을 간절히 바라던 과거의 그 자신이 생각나서인지, 자신을 외면한 신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는지, 자신의 업보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지옥 속이었지만 신으로 사는 순간에는 종종 행복했다.
천 년 동안 슬프지는 않았다. 천 년 동안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이쯤이면 그만 해도 되지 않을까. 아무리 큰 벌이라도 천 년을 받았다면 그만 해도 되지 않을까. 그는 생각했다.
은탁(김고은 분)은 그 때 왔다. 모든 걸 끝내고, 이제 생을 마치고 싶을 때.
하늘이 정해준 처음이자 마지막 신부였다. 길었던 삶을 끝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겁도 없이 "사랑해요." 라고 말했다. 모든 걸 가진 신에게서 쓸쓸함을 보았다.
그의 천 년이 벌일 리 없다고, 자신이 본 그가 나쁜 사람일리 없다고 말해 주었다.
신이 기다린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을 끝내줄 신탁의 도구였다.
하지만 기다림 끝에 모습을 드러낸 자신의 신부 앞에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첫 사랑이었다.
사랑은 그의 지옥을 바꿔놓았다. 끝내고만 싶던 생이, 이어가고 싶은 것이 되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모든 날이 좋았다. 하루만, 하루만 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녀의 생에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다. 생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다시 살고 싶어졌다.
어처구니 없는 운명이었다. 형벌의 지옥에서 그가 살고자 한 순간, 도리어 그의 신부에게는 죽음이 다가왔다.
애초부터 소멸의 도구였던 그녀가 사랑이 된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은탁을 살리기 위해 그는 그의 형벌을 끝내야 했다. 그리고 형벌을 끝내는 일은 또 다른 벌이 되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 끔찍하게 변해갔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아이에게 사랑한다 한 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 아이의 손에 죽어야 한다는 걸, 그 아이는 끝내 몰라야 했다.
운명까지 사랑하려 했다. 가혹한 비극이었지만 서로를 만나게 해 준 것에 감사하려 했다.
이 사랑이 신의 변수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신의 벌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둘의 운명은 그가 다시 깨어나자마자 죽인 자의 손에 끊어졌다.
죽는 순간 알았다. 그의 삶은 그녀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삶은 상이었다.
또 다시 깨어났다.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천 년의 벌이 끝나고 마침내 받은 신의 자비였다.
다시 본 그녀는 여전히 예뻤다. 기억에서 지워져도, 세상에서 소멸되어도, 죽었다가 환생해도 다시 살아나는 사랑이었다.
천 년을 가는 슬픈 사랑이었다.
만월과 신은 천 년을 살았다. 믿었던 이의 배신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을 죽인 댓가였다.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었다.
만월은 귀신들 속에서 그저 있었다. 죽이기 위해 원수의 환생을 기다리는 생이었다.
신은 마음 약한 신으로 살았다. 죽기 위해 신부를 기다리는 생이었다.
다른 마음으로 천 년을 살았으나 마지막은 같았다. 사랑이었다.
나는 <도깨비>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시청자여서, <호텔 델루나>를 처음 봤을 때, 만월은 어떻게 천 년을 그럴 수 있는지 좀 적응이 안 됐다.
특히 계속해서 삶의 의미를 찾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신은 있는 건지 고민하던 신과 달리, 만월에게는 천 년이나 되는 생과 삶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준 단서들과 내 궁예질을 약간 섞어서 만월의 서사와, 신의 서사를 비교해보니 둘의 삶이 모두 이해가 됐다.
생각해보면 한국 판타지 드라마의 역사에서 홀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주인공은 생각보다 많다.
모두 각자의 사연으로 오랜 세월을 견뎌왔고,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듯이, 천 년을 살아도 상황에 따라 여전히 다를 수 있는 게 인간이었다.
곱씹을 수록 좋은 작품이 있다. 나한테는 <도깨비>가 그렇다.
<호텔 델루나>의 종방을 앞둔 지금, 이 드라마가 곱씹을 만한 엔딩을 보여주기를,
만월의 천 년이 의미 있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