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이 없어진 시대의 집밥을 찾아서
한국 드라마에는 인물별로 주어지는 전용 단골 메뉴가 있다. 열받은 여주인공에게는 한밤중에 친구와 닭발, 썸타는 청소년들에게는 포장마차 떡볶이, 사제/형제 콤비에게는 돼지고기와 소주.
아, 최근에는 PPL의 바람으로 판도가 바뀌고 있기는 하다. 주인공들이 시간만 생기면 먹는 '지하철' 샌드위치, 물 대신 마시는 각종 음료 등등.
그래도 오늘은 전통적으로, 그리고 요즘까지 사랑받는 메뉴를 다루려고 한다. 비빔밥은 어떻게 한국 드라마 여주인공의 소울 푸드가 되었는지.
슬플 때, 화가 날 때, 고민 있을 때, 힘들 때 한국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그렇게 비빔밥을 먹는다. 특별할 것 없이 집에 있는 것을 그저 비벼놓은, 누구나의 집에 있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항상은 아니어도) 비빔밥은 여주인공의 설움과 아쉬움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는 화끈한 매운 맛, 그냥 담아서 비비기만 하면 되는 간단함, 재료를 새로 구매하지 않아도 되는 저렴함까지. 비빔밥이 가지고 있는 매력은 상당히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한국 드라마 여주인공의 '소울 푸드'가 될 정도로 비빔밥이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보다 '집밥'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집에서 해먹는 비빔밥의 맛은 아마 한국인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집에 있는 반찬들 때려넣고, 계란 후라이 하나 싹 해서 고추장에 쓱쓱, 참기름 둘러 먹는 맛! 원래 아는 맛, 매일 먹는 맛의 집합체인 비빔밥은 누구에게든지 익숙한 맛이다. 그리고 익숙해서 편안하다.
2018년 9월, 나는 홀로 4개월 간의 유럽여행을 떠났다. 여행 동안 제일 먹고 싶었던 건 뜻밖에도 집밥이었다. 집에서 먹던 비빔밥.
이게 왜 뜻밖인가 하면 나는 집밥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집밥은 그냥 '집에서 먹는 밥'일 뿐이지 특별히 의미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밥이 생각났던 적도 딱히 없고.
하지만 유럽에서는 다른 어떤 한국 음식보다도 훨씬 더 비빔밥이 먹고 싶었다. 어디서도 먹을 수 없는 우리집 비빔밥이.
엄마랑 통화를 하면서 우리집 비빔밥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 반응은 생각보다 시큰둥했다. "원래 니가 비빔밥 좋아했었나~?" 맞다. 나도 이유를 몰랐다. 왜 내가 비빔밥이 먹고 싶은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다음날, 집에서 비빔밥을 비벼 먹으며 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집밥이라서였다. 비빔밥의 맛은 소매치기를 만날까봐, 나쁜 사람에게 휘말릴까봐, 인종차별을 당할까봐 등등 여러 걱정 때문에 잔뜩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맛이었다. 비빔밥을 먹으면서 나는 비로소 편안해졌다.
'집밥'이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면 보통 할머니가 차려주신 한식 밥상, 엄마의 반찬 뭐 그런 것들일 것이다. 애초에 '집밥'이라는 단어는 집에 대한 추억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단어니까.
하지만 동시에 내가 떠올린 이미지 중에 내 진짜 기억은 없다. '집밥'이라는 단어에 특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다는 말이다. 요즘 세대, 그러니까 맞벌이 부모 밑에서 자란 세대들은 대부분 이렇지 않을까? 모두가 할머니 손맛, 엄마 손맛이 담긴 집밥의 추억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나무위키 백과에서는 '본인이 직접 만든 음식은 집밥이라 하지 않는다.'며 집밥이 어머니의 사랑과 가정의 따뜻함을 표현하는 대표적 개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하고 집안에서 밥을 짓는 사람이 '엄마'뿐은 아닌 세상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세상이다.
21세기의 집밥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느낌, 그 느낌을 주는 음식.
힘들었던 일들,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쌓인 밖으로부터 잠깐이라도 나를 분리해주는 집처럼, 내 속에 쌓인 설움을 없애주지는 못해도 달래주는 집의 맛.
비빔밥은 늘 여주인공의 눈물과 함께다.
여주인공의 실연의 아픔을 달래주던 비빔밥이 유난히 고단한 당신의 집, 밥상에도 오르기를 소망해본다. 가장 힘든 날, 가장 편안한 맛으로 당신에게 위로를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