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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이 Jan 30. 2020

인간이 바꿔놓은 세상의 의미

<좋아하면 울리는>

<좋아하면 울리는>, 넷플릭스, 2019.08.22., 연출: 이나정 / 극본: 이아연-서보라 /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인간은 늘 현실에 없는 것을 갈망한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판타지/SF 장르의 작품이 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지만,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이야기의 시작부터 판타지인 것처럼. 우리나라만해도 인간의 시작은,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 그것도 실제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단군신화를 말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대중은 새로운 걸 원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역사가 너무 오래된 나머지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창작자들은 계속해서 노력한다. 조금이라도 다른 걸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느낌을 주기 위해, 이전에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판타지/SF 장르의 작품은 최근 특히 영상 작품에서 아주 많이 제작되고 있다. 예전에는 제작비 때문에, 기술이 부족해서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면, 이제는 CG로 뭐든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캐릭터나 스토리 구성은 비슷하더라도 볼거리를 통해 새로움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거다.

드라마 산업도 예외는 아닌데, 우리나라에서는 SF보다는 판타지 작품이 훨씬 많이 제작되고 있다. (2016년부터 2019년까지 판타지 드라마는 총 100편이 넘게 제작되었으나, SF드라마는 9편이 전부였다. 열 배가 넘는 차이다.)

한국의 SF 드라마


판타지에 비해 SF가 홀대받는 것은 설명해야 함에 대한 부담감이 아닌가 싶다. 판타지는 어떤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을 통해, 혹은 원래 그렇다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SF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을 통해 무언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판타지: 현실적-상식적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거나 초자연적인 내용, 또는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내용_우리말샘
SF(Science Fiction):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를 벗어난 일을 과학적으로 가상하여 그린 소설_표준국어대사전
사실 SF와 판타지를 구분하는 기준이 뚜렷하게 정의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통념적으로 작품 안에서 소재로 삼은 어떤 비현실적인 사건을 과학적인 이론을 통해 설명하려 하거나, 과학의 발전을 통해 이룩해낸 성과라고 본다면 그것은 SF이고, 인간의 능력 바깥의 힘을 통해 실현된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판타지다. 예를 들면, 직접 수트를 만들어 입은 아이언 맨은 SF고, 신적 힘을 가진 토르는 판타지인 것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작품처럼 판타지와 SF는 한 작품 안에 혼재되어 사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 그런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SF를 내세운 작품이 있으니, 바로 <좋아하면 울리는>이다.



<좋아하면 울리는>은 SF작품이다

고작 어플 하나를 소재로 삼았다고, 이걸 SF라고 볼 수 있나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나는 감히 이 작품이 명백하게 SF라고 말하고 싶다.

'좋알람'이라는 어플의 존재가 의미하는 바는 상당히 크다. 그 정확한 방법은 극비라는 설정으로, 작품에서도 정확히 공개하지 않았지만, 모종의 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마음 중 '사랑'이란 것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사랑을 우정, 우애 등 종류에 맞게 구분할 수도 있으며, 호감-취향 등을 통해 미래에 좋아'할' 사람까지도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단한 세상이 아닌가? 생각도 알아차리기가 힘든데, 그보다 더 미묘한 마음을 알아차리는 기술이라니.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는 게 지금의 세상인데, 이 신통방통한 어플은 모두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더욱이 작품은 CG 효과를 통해 이 작품의 SF적 면모를 열심히 뿜어내고 있다. 사실, 어플 하나만으로는 SF 작품에서 제공하는 화려한 볼거리를 표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세계의 이동도, 차원의 변화도, 시간의 뒤틀림도 아닌 단지 핸드폰 화면 하나로 새로움을 표현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애매한 SF 소재를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고 낭만적이게 잘 표현해내고 있다.



주인공만 SF가 아닌 세상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주인공이 홀로 SF적 변화를 독점하는 보통의 SF작품과 달리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홀로 SF의 세상에서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러 SF 작품의 주인공은 SF적 상상력을 실현하는 기술의 개발자이거나, 혹은 SF적 상황에 남들보다 더욱 몰입하거나, 여기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따라서 당연히 스토리 안에서 이들은 SF적 변화를 거의 독점적으로 경험한다. 영화 <그녀>에서 남들보다 AI와 더욱 교감한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나, 영화 <트랜센던스>에서 최초로 뇌를 컴퓨터에 저장한 인간이 된 윌 캐스터(조니 뎁 분), 영화 <컨택트>에서 뛰어난 언어학적 소양으로 외계생명체와 대화해낸 루이스(에이미 아담스 분)처럼.

하지만, <좋아하면 울리는>의 주인공 조조(김소현 분)은 이들 주인공과 달리 남들 다 좋알람의 기능을 마음껏 누리고 있을 때, '방패'라는 되돌릴 수 없는 기능의 사용으로 더이상 마음을 표현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다른 SF작품의 주인공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체험한다면, 혼자 현실에 살고 있는 조조를 통해서 우리는 동질감을 느끼고 더욱 그녀에게 몰입하게 된다. 이미 변화한 미래를 보여주는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현실의 입장에서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곧 이런 세상이 올텐데, 당신은 감당할 수 있나요? 혹은 이렇게 되는 것이 옳은가요?" 물으며.



사랑을 꺼내 보여줄 수 있을까요?

들끓는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을 때 우리는 "내 마음 좀 꺼내서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타인의 마음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껏 애써왔다. 말로, 글로, 행동으로, 선물로. 우리는 항상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고, 증명받아 행복했다.

그런데 점점 사랑은 쉬워진다. '좋알람'이 없는 현실에서 우린 여전히 표현해야 하지만, 그 방식과 속도는 매우 달라졌다. 이제 우리는 '좋아요' 버튼 하나만으로도 관심을 표현할 수 있다.


알람이 울려야 사랑인 세상


포스터 속 문구대로 '알람이 울려야 사랑인 세상'에서 홀로 알람없이 살아가는 조조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이 사랑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가슴이 두근거려야 사랑인지, 보면 미소가 지어져야 사랑인지, 함께 있으면 편안해야 사랑인지, 내 옆에 있어 안심되는 사람이 사랑인지, 문득 생각나고 보고 싶은 사람이 사랑인지.

두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조조의 모습은 때로 고구마처럼 답답하기도 하고, 때로 누구도 놓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조가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다. 사랑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사랑이 아닐까봐.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소중한 두 사람이 '증명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아프게 될까봐.



판타지 작품과 SF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차이는 그 속에 숨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판타지 작품이 '하늘이 바꿔놓은 것'에 대한 탐구라면, SF는 '인간이 바꿔놓은 것'에 대한 탐구다. 우리는 신의 뜻으로도 소중한 것을 깨달을 수 있지만, 우리 스스로의 역사와 변화를 통해 소중한 것을 잃지 않을 수 있다. SF를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여기 현실에서 스스로 중요한 것들을 놓지 않는 연습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계속 쉬워지는 사랑을 보고만 있다가 우리가 갖고 있던 그 큰 사랑, 어마어마한 사랑을 잃어버리지는 않을지, <좋아하면 울리는>은 묻고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은 얼마나 명확해질 수 있는지.

오랜만에 물음표가 있는 좋은 SF 작품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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