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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이 Mar 18. 2020

21세기의 여성 판타지

<동백꽃 필 무렵>

<동백꽃 필 무렵>, KBS, 2019.09.18.~2019.11.21., 연출: 차영훈 / 각본: 임상춘 / 제작사: 팬 엔터테인먼트, 최고시청률: 23.8%




2019년 하반기의 최고작을 꼽으라면 단연 <동백꽃 필 무렵>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살아 숨쉬는 듯한 캐릭터와 배우들의 호연,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는 대사로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것은 모든 캐릭터에 애정을 갖게 하는 제작진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인 동백(공효진 분)과 용식(강하늘 분) 뿐 아니라 조연 종렬(김지석 분), 제시카(지이수 분), 규태(오정세 분), 자영(염혜란 분), 향미(손담비 분), 필구(김강훈 분), 덕순(고두심 분), 정숙(이정은 분), 심지어는 변 소장(전배수 분)을 비롯한 동네 아줌마들까지 제작진의 손을 거쳐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랑스럽고 이해 가능한 캐릭터로 거듭났다. 드라마가 종영한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떠올려 보면 아직도 옹산에서 잘 살고만 있을 것 같은 생생함이 있다.

이렇듯 여러 부분에서 아주 탁월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에도 아쉬운 지점은 있었다.



'유니콘' 용식

드라마 산업에서 여성 시청자는 중요한 수요층이다. 예전부터 여성은 남성에 비해 드라마 시청률이 높았고, 한국 드라마판은 특히 여성 시청자를 겨냥한 로코나 멜로 작품이 유난히 많이 만들어지고, 성공했기 때문. 그래서 간단하게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말할 수 있는 여성 판타지 작품들은 끝없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다.

다만, 현재의 셈법은 조금 복잡하다. 여전히 여성 시청자는 중요한 소비층인데, 중-장년 여성 시청자들이 원하는 드라마와 20-30 여성 시청자들이 원하는 드라마, 그리고 10대 여성 시청자들이 원하는 드라마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디를 겨냥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여전히 여성 시청자를 타겟으로 하더라도 어떤 연령층을 타겟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스토리 구조나 컨셉을 달리 잡는 것처럼 보인다.

내 맘대로 나눠본 타겟 시청자 연령층 (왼쪽부터 순서대로 10대, 20-30대, 40대 이상)

이런 현실에서 '용식'이는 굉장히 영리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여러 연령대를 한 번에 공략하기 위해 만들어낸 '하이브리드형' 캐릭터 같달까?

흔한 여성향 판타지 작품의 주인공과 용식은 분명히 다르다. 재벌이 아닌데, 그렇다고 비상한 두뇌를 자랑하는 인물도, 뛰어난 싸움 실력을 자랑하는 캐릭터도 아니다. 예전처럼 여자 주인공의 상황을 바꿔주는, 여자 주인공을 자신과 같은 위치로 끌어올려주는 남자 주인공도 아니다. 용식은 촌에서 자라 내세울 거라곤 바람직한 성품 뿐이고 (외모는 작중에서 그리 높게 평가되고 있지 않는 것 같으므로 제외하겠다.) 무엇보다 여자주인공이 '스스로' 빛날 수 있게 돕는 캐릭터다.

이런 용식이의 모습은 현대 여성들이 원하는 남성상을 정확하게 간파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처럼 보인다. 남성 캐릭터에 의해 여성 캐릭터가 변화한다는 기본 구조는 유지하면서도 요즘 여성이 원하는 것, 계급 상승이 아니라 정서적 지지와 응원이라는 소재를 넣어 내용물을 바꾼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 '모성애' 소재까지 넣어 이정도 변화로는 만족하지 못할 수 있는 중-장년층까지 훌륭하게 사로잡았다. '현대 여성 판타지'가 지향할 수 있는, 가장 영리한 구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니콘 같은 캐릭터이면서도 '무조건 나를 지지해주는' 현실의 욕망이 반영된 용식으로 제대로 된 판타지를 구현해 냈으니 말이다.



'서로'를 구원하는 주인공

나는 드라마의, 특히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이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맺는 걸 좋아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반드시 당신이어야만 하는 그런 명확한 관계 말이다. 이런 작품에서 주인공은 명확한 역할을 부여받게 되고,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사랑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제공해준다.

그래서 나는 예전 가치관을 가진 작품, 그러니까 신데렐라 스토리를 띤 작품들 중에서도 주인공이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맺는 작품은 아직까지도 좋아한다.

그런데 <동백꽃 필 무렵>에서 용식과 동백의 관계는 철저히 '동백'을 위한 관계처럼 보였다. 사실 작품에서 용식이 동백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이유는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물론 동백은 사랑받아 마땅한 여자다. 그러나 용식에게 반드시 동백이 필요한가를 생각해보면 물음표가 찍힌다. 그래서 나는 사실 작품이 막바지로 달려갈 때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백과 용식의 관계가 필연적인 단단함을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아쉬웠다.



결국 '스스로'의 구원자

하지만 그 와중에도 대단한 것은 작품에서 용식과 동백에게 상보적인 관계를 부여하지 않은 것이 모두 의도된 장치로 보인다는 점이다. 작품에서 용식은 동백이 변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동백을 변화시키는 트리거는 되지만, 결국 변화하기로 결정하는 건 동백의 몫으로 남겨둔 것이다. 그래서 용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백의 '조력자'라는 포지션을 유지한다.

동백은 흔한 여성 판타지의 주인공처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남자 주인공에게 손잡혀 끌려가는 수동적인 캐릭터가 아니다(물론 남자 주인공이 데려가는 곳이 나쁜 곳은 아니겠지만). 스스로 깨닫고, 결심하고, 결국은 행동으로 삶을 바꿔나가는 주체적인 캐릭터다. 그리고 이런 설정은 이 작품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국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 기존 로코의 정해진, 그리고 시청자가 바라는 결말이라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며 두 사람의 사랑이 마치 남은 인생의 전부를 책임지는 것처럼 포장하는 결말이라면, 이 작품의 지향점은 동백과 용식의 사랑보다 '동백의 행복'이다.

작품에서는 마지막에 동백이 용식과 부부가 되며 사랑도 이뤘지만, 만약 동백이 끝내 용식과 관계를 맺지 않았더라도 그것 나름대로 아름다운 결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백은 용식 덕분에 변화했지만, 변화한 덕분에 용식 없이도 스스로 행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바람직한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런 모습이 당연한 게 아닌가. 인생에서 사랑은 일부이지, 전부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데. 상보적이지 않아서 아쉽기는 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둘의 애정관계를 약화시키는 대신, '동백'이라는 주인공의 성장을 훌륭하게 강화하고 있으니.



원래도 좋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리뷰를 쓰며 더 깊게 생각해 보니, 더 좋은 작품이었다.  임상춘 작가님의 다음 작품이 너무나도 기대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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