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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드 Aug 11. 2024

살려내고자 하는 열망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 전도서 3장 12절      


책을 고를 때, 책 표지 색깔은 중요하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표지 색깔을 정하는 일은 대체로 출판 마무리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작가는 출판 마무리 단계가 오면 서문을 쓰고 어떤 표지 색깔을 입히면 좋을지 고민한다. 표지 색깔을 정할 때 글로 담아낸 세상과 생각이 과연 어떤 빛깔로 표현되면 좋을지 궁리한다. 독자에게 일차적으로 건네는 작가 내면의 색깔이기 때문에, 독자를 설득할 만한 이유 있는 색깔이 필요한 셈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나는 책을 볼 때 책 표지 색깔에 관심을 오래 두는 편이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표지 색깔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종종 있다. 『피카소 시집』(피카소)이 그러했고 『현대의 불안』(귀스타브 르 봉)이 그러했다. 이들 책에 매료된 이유는 순전히 시커먼 책 표지 색깔 때문이었다. 까맣고 시커멓고 먹먹한 빛깔들에 마음이 쏠리는 이유는 마치 그것이 작가 내면을 맴돌던 어떤 상흔의 농축된 빛깔인 것만 같아서였다. 이건 순전히 책을 선정하는 나의 감상적인 편견의 한 방식일 뿐이다. 책 표지 색깔은 작가나 출판사 맘대로 일 것이고, 나는 그 맘대로의 질서 또한 마땅히 존중한다.     


동네 도서관에 간 날이었다. 도서분류 800번 대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만약은 없다』(남궁인)라는 책등에 쏠렸다. 초록색이라고 하기엔 그 색이 너무나 짙은 초록색이었다. 죽음과 삶, 그 경계에 어떠한 색이 존재한다면 이토록 청록빛일까. 하여 나는 희망이라는 초록과 절망이라는 검정으로 버무려진 청록빛 표지를 어떤 의례처럼 매만지면서 독서할 준비를 마쳤다. “나는 분명히 죽으려 한 적이 있다.”라는 서문의 첫 문장을 읽기만 했는데도 심장에 청록빛이 마구 스며들었다. 문장에 물드는 느낌이 정말로 좋았다. 이 책을 끝까지 읽겠구나 싶었다. 분명하고 강렬한 문장이었다. 언젠가 써 보고 싶었던 문장이었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죽으려 한 적이 있었으니까. 죽고 싶을 때 듣는 음악이 있다. 똑같은 음악을 찾아 듣는 사람을 만난 느낌이었다. 첫 문장만 읽었을 뿐인데.     


남궁인은 스스로 고백하건대 한때 자살을 시도했던, 죽으려 했던 경험자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고 최악이 난무하는 응급실을 일터로 삼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죽음 안으로 뛰어든 자였다. 그랬기에, 응급실에서 많은 사람의 고통을 보았으며, 보았기에 공동선에 가까운 영역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글 쓰는 의사’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사람을 치료하고 살리는 의사로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로서,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녔다. 짙은 어둠, 검은 심지,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경계, 믿음, 애통, 촛불 같은 단어들이 여전히 그의 곁을 맴돈다. 나는 그가 살려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인간형이라고 생각한다. 이토록 살려내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까지 그는 먼저, 저 스스로를 살려내야 했을 것이다. 죽고자 하는 열망을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전환했을 그때, 한없이 굳어버리고자 했던 한 인간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간 그가 태웠을 촛농의 우물을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촛농이 고이고 굳고 고이고 굳은 시간들 그러니까 죽음과 삶, 그 경계에서 뛰어다녔던 불길로 그슬린 기록이, 이 책에는 빼곡하다.   




인도였다. 생의 마지막 여행지로 점찍어 둔 나라. 아주 멀고 먼 나라.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나라. 기왕 죽으러 간다면 멀고 먼 나라여야 했다. 자비가 필요했으므로 성스러운 나라여야 했다. 신원 미상과 국적 미상으로 발견되는 상상은 끔찍했지만 실현할 수 있는 꿈이기도 했다. 그러나 낯 모를 사람들에게는 바다에게는 나의 꿈이 민폐가 될 게 뻔했다. 배고픈 물고기들만이 이방인의 살집을 환영해 주겠지. 짧은 궁리 끝에, 나는 코이카(KOICA) 해외봉사단원의 신분이 되었다. 얼마의 참가비를 지불하고 인디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청력 혹은 시력을 잃어버린 인도 아이들 곁에서 실뜨기와 그림 그리기 놀이를 했다. 회칠한 낡은 화장실을 청소했고 아이들과 둥글게 모여 앉아 쟁반에 나눠준 누르스름한 카레밥을 손끝으로 긁어모아 먹었다. 인도 아이들 곁에서 실체가 없는 슬픔과 죽음 충동은 허황된 사치였음을 직감했고 목도했다. 그러나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윤동주)기에 슬픔과 죽음 충동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애썼고, 봉사라는 가면 속에서 짐짓 밝은 척하는 내가 싫지만도 않았다. 아이들은 이방인의 불완전함을 눈치채지 못했고, 시도 때도 없이 하얀 치아로 웃어 주었다.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2주간은 함께라서 소중했다. 그렇게 따뜻한 열망이 흘러갔다.     


주어진 봉사 임무를 마치기도 했지만, 고아는 휴양지였고 나는 ‘분명히’ 쉬고 싶었다. 그래서 인도 중서부에 있는 고아(Goa)로 향했다. 숙소에 작은 짐을 팽개쳐 놓고 고아 해변에서 이국 나라의 맥주와 고아라는 말을 목구멍으로 쉴 새 없이 넘겼다. ‘고아, 고아, 참 희한한 지명이야.’ 고아 해변의 모래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넋을 잃어버리기 좋은 석양빛 속에서였다. 들썩거리는 파도 너머로 태양빛이 점점이 사그라들었고, 붉게 타올랐던 모래 알갱이들은 너무나 작고 보드라웠다. “모래야 나는 얼마나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나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김수영) 손가락 사이로 미련 없이 모래알을 쏟아내면서 ‘나’의 ‘적음’에 대해 토로하는 김수영의 시를 읊었다. 한탄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울부짖음. 아직 향신료 냄새가 배어 있는 손끝을 털고 일어섰다. 취기가 올라와 휘청거렸다. 자, 바다로 가자.      

 

바다로 뛰어들었다. 파도는 너울댔고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순식간에 바닷물에 떠 있는 상태로 아찔했다. 죽으려 했는데,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았다. 발끝이 바닥에 닿아야 했다. 오로지 발끝이 닿는 곳으로 나아가야 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취기를 뚫고 나온 생존 본능이었다. 내 키보다 낮은 안전지대로 가야 했다. 인도양에서 밀쳐오는 파도와 고아 해변가에서 밀려 나가는 파도 사이에서, 나는 볼품없이 허우적거렸다. 이 와중에 바다는 냉담할 정도로 차가웠다. 뻣뻣한 몸뚱어리 하나를 깊숙한 먼 데로 끌고 가려는 파도의 유연한 출렁거림이 야속했다. 둘 중 하나였다. 고아 바다에 빠져 죽든지 돌파하든지. 상황이 급박했다. 돌파하자. 생각할 겨를이 없이 나는 돌파하는 쪽을 선택했다. 개처럼, 부릅뜬 눈 뜬 개처럼, 나는 헤엄쳐서 기어 나왔다.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뼈들이 저려왔다. 내가 ‘분명히’ 죽으려 한 적이 없었다는 걸 통렬히 깨달았다. 발끝이 닿지 않아 무서웠고, 털끝이라도 닿고 싶어서 환장했다. 살고 싶어서 버둥거렸다. 그뿐이었다. 그렇게 내 죽음의 시도는 어설프게 끝났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복귀했다. ‘죽고자 몸부림쳤다’라는 낯부끄러운 기록만이 덩그러니 한 줄 남았을 뿐이었다. 기록되었으므로, 고로 나는 더 이상 죽으려 애쓰지 않았다.      

그날 이후부터일까. 책 속에서건 뉴스 기사에서건 일상 속에서건 나의 일정 감각은 위태로웠던 목숨들에 닿아있다. 죽음을 시도했거나 실패했거나 혹은 죽음에 성공한 적이 있는 영혼들 망자들의 곁을 기웃거린다. 칼에 찔리고 피를 뒤집어쓴 사람들. 정신을 잃고 호흡을 멈춘 사람들. 싸늘하게 식은 육체들. 흔들거리는 초점들. 뒤틀린 다리들. 혈흉으로 가득 찬 폐들. 우지끈 무너져 내린 갈비뼈들. 피칠갑한 얼굴들. 으깨진 다리들. 말린 혓바닥들. 절규와 비명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전쟁터. 응급실. 하얀 포들. 까만 지퍼들. 마지막 인사들. 절대로 남 일이 될 수 없는 죽음들. 이 모든 참상이 담긴 남궁인의 ‘응급 기록물’을 읽는 내내 나는 깊이 죄송했다. 고아에서의 내 작위적인 죽음의 포즈는 얼마나 한심스러운가. 얼마나 경솔한가. 이 얼마나 부박한 초라함인가.     


까만 심지에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한번 탔던 심지에 불이 쉽게 붙었다. 초에 불씨가 붙자 딱딱했던 초 덩어리가 육체를 입고 살아났다. 촛불이 따뜻한 이유는 출렁거리고 흔들거리는 빛깔의 사위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리라.




약국에 가면 수백 수천 종의 ‘약’이 즐비하다. 조제약, 두통약, 변비약, 관절약, 혈압약, 콜레스테롤약, 잇몸약, 여드름약, 아토피약, 물약, 가루약, 연고약, 알약, 이약 저약 등등. 이 하고많은 약 중에 구할 수 없는 약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만약’이다. ‘만약을 주세요!’ 하면 ‘어쩌다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그때’를 주어야 할 텐데, 지나간 날이거나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날의 달력을 푹 찢어서 약사가 던져준다면야, 그나마 다행일까. 특히, 긴박하게 촌각을 다투는 응급실일 경우 그곳에 ‘만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에 인공호흡기를 부착해야 하고, 당장에 수혈해야 하고, 당장에 사지를 절단하거나 꿰매야 한다. 최악의 경우, 지금 당장 살려내야 한다. ‘당장’만이 존재한다. “만약, 빈 수술방이 있었더라면 환자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만약, 곁을 지키던 나를 봐서 환자가 좀 더 버텨주었다면……”이라는 가정의 말줄임표는 “만약, 다음 신호를 받고 출발했더라면 죽음에 이르는 교통사고에 휩쓸리지 않았을 텐데……” “만약, 이런 몹쓸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더 살 수 있었을 텐데……”라는 죽은 환자의 바람만큼이나 허공을 잃어버린 메아리일 뿐이다. 수면제를 다량 복용해 자살을 시도했던 자신의 환자가 퇴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확실한 방법으로 죽어버린 시신’으로 되돌아왔다면. 환자의 참혹한 죽음을 직면한 주치의에게 만약은, 환자의 불가능성을 잔인하게 대면한 후 폐기해야 할 어떤 가능성일 뿐이다. 어쩔 수 없었고, 불가피했고, 이미 생에 대한 의지가 꺾여 있었으니, 막다른 길에서 선 당신을 누군들 붙잡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어쩌면 아는지 모른다. “만약의 세계는 네가 살고 있는 매일의 세계가 아닌, 네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세계”(요시타케 신스케)라는 걸 말이다. 만약의 세계는 죽고자 했던 사람이 기적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그런 세계라는 걸 말이다. 그런 만약의 세계를 응급실에서는 수시로 요청한다는 걸 말이다. 사망을 선고하는 마음. 그 심정을 추스르기 위해서라도, 쏟아지는 다음 환자를 마주할 면목에서라도, 그는 죽음과 삶이 널뛰기하는 응급실 현장을 숨 가쁘게 복기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선지 활자로 복기된 응급실의 생생한 실재는 잔혹하고 끔찍하다기보다는 준엄하고 숭고한 쪽에 가깝다. 검은 펜 끝을 신중히 움직이면서, 그는 한 번 더 자신의 환자를 겪어냈을 것이다.      


지난 3년간 코로나 사망자보다 자살자가 더 많은 우리나라(메디컬투데이 2023.10.11)에서는 눈사람마저 자살한다.(최승호) 2021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연간 자살로 사망하는 사람은 1만 3352명으로 하루에 36.6명, 39분마다 1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는 이야기다.(뉴스 1 2023.12.14.) 인간의 고통과 상실을 짧은 유서로 소비하는 영상들. 자녀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장의 ‘살해 후 자살’ 뉴스들. 자해, 방화, 고독사, 추락사 등등. 참담하고 참혹한 우리 시대의 일면들. 응급의학과 전공의를 기피하는 열악한 의료계 현실들. 알지 못하는 세계들.      


나로서는 도저히 답을 내놓을 수 없기에, 글을 마무리해야 하기에 ‘글 쓰는 의사’인 그에게 기대어 우리 시대의 시정신을 묻는다. 자, 지금 여기 성탄절에 불행을 겪고 응급실 문턱을 넘어온 300여 명의 사람들이 있다. 우리 시대의 시정신은 누구로부터 발현된단 말인가. 우리 시대의 시정신을 어떻게 발동시켜야 하는가. 아마도, 그러면 이렇게 답해주지 않았을까. 불행을 겪고 있는 생명부지들을 당장, 살려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모든 당신들로부터.     




그리고 이제 나는 깨닫는다. 누군가를 살려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시를 써 본 적이 없었기에, 나의 시들이 그 누구도 살려낸 적이 없었음을 뉘우친다. 그리고 고백하고, 기도한다. ‘주님,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타고난 예민성으로 유독 아픈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적인 인간형이 되겠습니다. 촛불의 검은 심지를 펜으로 삼겠습니다. “자리나 잡자고 이 거리의 쏟아짐을 목격하는 자가 아니”(202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심사평 중) 되겠습니다. 이 시대의 구경꾼으로 전락하지 않겠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한용운)붓겠습니다. 죽고자 했던 열망을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전환하겠습니다. 살아있으므로, 살려내고자 하는 무해한 열망을 품겠습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최승호) 신음하는 눈사람들의 차가운 몸과 마음에 청진기와 메스를 가져다 대겠습니다. 당신이 아프면 저도 아프고, 당신이 기쁘면 저도 기쁘겠습니다. 세상을 향해 전진하여, 고요한 산기슭, 쇼핑몰, 고층 아파트, 바다, 저수지, 사무실, 전철역, 고시원, 원룸촌, 다세대주택, 아파트, 술집, 건설 현장, 마당, 지하도로, 고속도로 한복판 어디에서건, 당신을 살려내고자 열망하겠습니다. 화답할 때에도 화답하지 않을 때에도, 나의 아름다운 이웃과 슬픔과 기쁨을 나눠 먹으며 살겠습니다. 아멘.’


이른 새벽, 일터로 향하는 당신의 등 뒤로 “운전 조심해!”라고 외쳤다. 닫힌 현관문 앞에 서서, 나는 혹시나 이게 시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비록 이것이, 우리 시대의 시정신으로 가고자 하는 수천수만 빛깔의 한 조각일지라도, 한낱 모래 알갱이의 가벼운 반짝 거림 일지라도, 어쩌면 그건 ‘당신, 제발 죽지 마.’라는 말과 통할지도 모르니까.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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