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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그릇 Sep 05. 2019

10. 엄마와 외할머니

냉정함의 대물림

엄마는 6남매인지 7남매인지 중에 막내딸이자 유일한 딸이다.

엄마한테 몇 번 들은 적이 있긴 한데 오빠가 몇 명이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만나 본 외삼촌이라고는 그나마 가까이 살던 셋째 외삼촌뿐이었다. 나머지 외삼촌들은 멀리 살기도 하고 엄마와 사이도 좋지 않아 연락조차도 거의 안 하는 듯했다.

남동생 이야기는 들어본 기억이 없으니 아마도 막내딸일 것이다. 유일한 딸이라는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엄마에게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제 와서 그런 걸 물어보면 ‘그것도 모르냐?’고 타박만 들을 것 같으니까.


어쨌든 하나뿐인 여동생이었으면 오빠들이 이뻐했을 법도 한데 그렇지 못했나 보다. 이혼하고 어렵게 사는 엄마에게 그다지 도움을 준 것 같지도 않다. 탐탁지 않은 결혼을 해서 속을 썩이더니 결국 이혼을 하고, 다시 한 결혼에서도 잘 살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한 여동생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엄마의 말속에서 그분들에 대한 상처를 엿볼 수 있었다.


엄마는 부모님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외할아버지는 전근이 잦았고, 학교에 익숙해지고 친구들을 사귈만하면 전학을 가야 하는 상황이 너무도 싫었다고 한다.

학교마다 수업 진도도 조금씩 다르다 보니 아는 내용을 또 배우기도 하고, 배우지 못하고 넘어가는 부분도 생기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하고도 멀어졌다고 한다.

그런 엄마를 외할머니라도 따뜻하게 감싸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줄줄이 아들만 키우셔서 그랬는지 외할머니는 참 차갑고 냉정한 분이셨다.



외할머니의 냉정함에 관해서는 나도 뼈에 사무치는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다.


엄마가 집을 나가고 이혼이 성립되기 전이었을 것이다. 나는 몇 번 엄마가 없는 외가댁에 맡겨진 적이 있었다.

농번기라 바쁜 때였을까. 아직 어려 집에 혼자 두기에는 불안하고 논에 데리고 다닐 수도 없어 외할머니댁에 맡겨진 게 아닐까 싶다(때로는 추수철에 할머니를 따라가 벼를 베고 난 자리에 앉아 인형놀이를 하고 놀았던 기억도 있다).


아무튼 내 기억 속의 외가댁은 참 낯설고 어려웠으며 그 안에 있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엄하고 무서웠다.

나는 이웃집에 사는 또래 여자 아이와 자주 어울려 놀았는데 어느 날 그 아이와 같이 과자를 사 먹기로 했다.

외할머니에게 과자값을 달라고 졸랐는데 외할머니는 안된다고 했던 것 같다.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울었다. 그래도 외할머니는 끝까지 과자값을 주지 않았다.

내가 그런 요구를 자주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도 없는 낯선 곳에서 주눅이 들었으면 들었지 뻔질나게 과자값을 요구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부모님의 이혼을 목전에 둔 어린아이가 불쌍하지도 않았을까. 그까짓 과자값 한 푼 쥐어주면 좋았을 텐데.

그날의 모질고 냉정했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아주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이혼이 언제 성립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 외가댁과의 왕래가 완전히 끊어졌다.

그리고 집에서 혼자 놀던 어느 날 호기심에 열어 본 서랍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서류를 보고 나는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른 중 누구도 나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밥상머리에서 가끔 엄마를 ‘몹쓸 년(혹은 더 심한 욕)’이라고 욕하는 할머니의 격한 음성을 들으며 어렴풋이 이제 엄마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나에게도 알 권리가 있었을 텐데 아무도 어린아이의 권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냉혹한 현실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처한 현실은 이미 충분히 냉혹했고, 감춘다고 모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런 외할머니를, 엄마를 만나러 갈 때마다 함께 찾아뵙곤 했다.

엄마는 살갑지는 않을지언정 딸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하고 살려는 듯, 한 번씩 과일이나 생선 등을 사서 외할머니를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냉정했던 과거와 달리 외할머니는 갈 때마다 나를 반겨주셨다. 혼자 사는 노인들은 누구든 찾아오면 반가운 법이니까.

교회에서 노인들 상대로 일본어를 가르쳐주는데 거기서 배웠다며 몇 가지 단어를 말하고 나에게 맞냐고 물어보시기도 했다.

“네~ 맞아요. 잘하시네요~!”

그렇게 맞장구치며 나는 손녀의 도리를 했다.


어느 날 엄마는 외할머니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했다.

엄마가 재혼했다는 사실을 셋째 외삼촌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음에도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이다. 딸이 어떤 사람과 살고 있는지 궁금해 한 번 데리고 오라고 할 만도 한데 외할머니는 엄마의 재혼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의 태도가 엄마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며 서운해하셨다. 이혼과 결혼을 반복하고 경제적으로도 보잘 것이 없는 엄마의 삶을 외할머니는 외면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도 엄마 역시 엄마의 엄마로부터 상처를 받고 있었다. 내가 엄마의 나이가 되었을 때도 나는 여전히 엄마로부터 상처를 받고 있을까. 불현듯 궁금해졌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 엄마를 찾아가도 외할머니 집으로 우리를 데려가지 않으셨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외할머니에게 아이의 얼굴을 보여드린 적이 없는 것 같다.


엄마는 외할머니의 냉정함에 서운함을 토로하면서도 그 자신이 외할머니와 닮았다는 사실은 잘 모르시는 것 같았다.

본인은 외할머니보다는 훨씬 나은 엄마이며, 자식과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엄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요즘은 뜸해졌지만, 해마다 비싼 우편요금을 들여 김장김치며 건나물을 보내주시고, 찾아갈 때마다 바리바리 챙겨주시기도 하니까.


하지만 본질적으로 엄마의 내면은 외할머니와 같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몇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다.

둘째를 출산한 지 4개월이 지났는데, 산후조리는 잘했는지, 아이들은 잘 크고 있는지, 둘째는 누구를 닮았는지, 한국에는 언제쯤 오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하지도 않은가 보다. 혹은 궁금해도 자존심과 고집 때문에 꾹 참고 있거나.


엄마는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식이 부모한테 연락해야지, 부모가 자식한테 연락하냐?”

연락 안 하는 내가 불효자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에게 연락 못 할 건 또 뭔가. 엄마도 나도 참 만만치 않은 고집불통들이다.



외할머니와 엄마의 냉정한 면모가 나에게도 대물림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도 그리 다정다감한 성격이 못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적어도 냉정함으로 아이들에게 상처 주는 엄마는 되고 싶지 않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에게는 딸이 없다. 아들만 둘을 낳았고, 셋째는 낳을 계획이 없으니 내 인생에 딸은 영영 없을 예정이다.

엄마와의 사이에서는 가지지 못했던 모녀간의 유대감을 딸과의 사이에서 꼭 경험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녀의 성별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깔끔하게 포기하는 수밖에.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정다감하지 못한 나로 인해 내 딸이 상처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아들 녀석들은 커갈수록 섬세한 감정의 주고받음보다는 자기 만의 세계에 빠져 놀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세 돌이 지난 첫째는 기차놀이 자동차 놀이에 빠지면 대답도 잘 하지 않는다. 벌써부터 엄마 침이 더럽다고 뽀뽀도 안 해주고 도망 다니며 자기가 원할 때가 아니면 안아주는 것도 거부한다.

정서적인 유대감이야 당연히 중요하지만, 엄마로서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냉정하며 적당히 거리감이 있는 편이 서로를 위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이런 성격을 아시고 신께서 아들만 보내주신 것일까.



외동인 나는 나이 들어 서로 의지할 수 있는 형제자매들이 참 부러웠는데 엄마를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그나마 말이 통하고 성향이 맞는 셋째 외삼촌과 왕래가 좀 있을 뿐이고, 오빠들이 그렇게 많아도 엄마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엄마의 인생도 참 외롭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춘기 시절 아버지와는 늘 부딪히고 어머니의 품은 안겨서 쉴 만한 곳이 못 되었다.

어떻게든 빨리 독립하고 싶어 도망치듯 결혼한 남편은 폭력과 폭언으로 엄마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겼고 하나뿐인 피붙이와는 생이별을 했다.

성인이 된 딸을 다시 만났지만 살갑게 엄마 곁에 다가서기보다 여전히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엄마가 힘든 내 앞에서 자꾸만 '나도 힘들었다'라는 식의 하소연을 하는 것이, 어쩌면 엄마 자신이 충분히 위로받고 공감받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엄마에게서 과거에 대한 위로와 공감을 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엄마 역시 그 누구보다도 딸인 나에게 위로받고 싶은 것은 아닐까.



불현듯 엄마를 이해하고 싶어 진다.

이해하고 싶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들이 내 마음속에서 어렵게 싹을 틔우려 하고 있다.

이러다 어느 날 내가 먼저 엄마에게 카톡으로 안부를 묻고 한창 귀여워진 둘째의 사진을 전송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아닌가보다.

여전히 내 마음은 엎치락뒤치락한다.

바쁜 일상에 잊고 지내다가 불현듯 보고 싶기도 하고, 마음이 지쳐 힘든 날이면 마구 원망스럽기도 하다.

엄마를 향한 이해의 싹을 틔우기에는 내 마음밭이 아직 척박한가 보다.

물을 주어야겠다.

지금 쓰는 이 글이 물이 되어 내 마음에 뿌려지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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