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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그릇 Aug 23. 2019

일본인과 무통분만

일본 출산기-1

나는 일본에서 두 아이를 낳았다.

임신부터 출산, 산후조리의 전 과정을 일본에서 겪었고, 첫째와 둘째를 각각 대학병원과 동네 산부인과에서 낳았다.

나의 이 경험이 혹시라도 일본에서 아이를 가질 예정인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기록해 보고자 한다.




최고의 타이밍에 찾아온 첫째 아이


내가 첫째를 대학병원에서 출산하게 된 건, 그 당시 내가 대학병원 부인과에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러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왼쪽 난소에서 낭종이 발견되었고, 당장 수술해야 할 크기는 아니었기에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며 지켜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동네 산부인과로 검진을 다녔다. 그런데 2년 정도 추적 검사를 받는 사이 낭종의 크기는 조금씩 커졌고, 수술을 고려해야 할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의사는 대학병원에 가 보기를 권했고 소개장을 써주었다. (일본에서는 대학병원과 같은 3차 의료기관에 가기 위해서는 동네 병원 의사의 소개장이 필요하다. 소개장 없이 가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 경우 초진 시에 보통 5천엔 정도의 비용을 별로로 지불해야 한다.)

 

나는 소개장을 들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대학병원의 분원으로 찾아갔고 그곳에서 MRI 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낭종의 크기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모양이 전형적이지 않아 악성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양성인지 악성인지은 MRI로는 판단할 수 없고 수술과 동시에 조직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고도 했다.

당시 나는 임신을 원하던 상황이었기에 웬만하면 수술을 피하고 싶었지만, 의사는 만일 낭종이 악성일 경우 임신을 하면 혈류가 증가하여 급격하게 크기가 커질 수도 있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그래도 나는 내키지 않았다. 2년에 걸쳐 서서히 커진 낭종이 악성일 리 없다는 나름대로의 판단도 있었다. 내가 망설이자 의사는 일단 몇 달 뒤에 다시 와보라고 했다.

 

몇 달 뒤에 다시 찾아갔을 때 의사는 조금 더 강한 어조로 수술을 권했다. 마침 한국 방문을 앞두고 있었던 나는 한국 병원에 가서 의견을 들어보겠다고 했고, 의사도 찬성이라며 흔쾌히 MRI 자료를 넘겨주었다.


한국에 갔을 때 없는 시간을 쪼개서 S대학병원을 방문했다. 의사는 낭종의 크기도 크기지만 무엇보다 지금 자궁벽이 너무 두꺼워져 있는 게 이상하다고(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된다), 되도록 빨리 수술 날짜를 잡자고 했다.

나는 아직 한국에서 수술을 할지 일본에서 수술을 할 지도 못 정한 상태였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일단 수술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석연치가 않았다.

하필이면 한국 체류 기간이 생리 기간과 겹쳐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웬걸, 한국에 있는 동안 생리는커녕 컨디션도 좋고 입맛도 너무 좋았다.

특히 시댁에 갔을 때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와 파김치의 조합이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남편과 함께 절제를 잃고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평소 위가 약해서 여행 중에는 늘 소화불량에 시달리곤 하는데 그 날은 심지어 소화도 잘 되어 둘 다 신기해하던 참이었다.

더욱이 나는 생리 어플이 알려주는 날짜에 생리를 시작할 정도로 주기가 정확한 편인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 이상 늦어지는 것도 이상했다.


일본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남편을 회사에 보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테기로 검사를 했다. 두 줄이었다. 역시나 내 몸은 내가 잘 아는 거구나.

바로 3일 전에 대학병원 산부인과에서 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의사는 임신 사실을 몰랐다. 임신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상태로 검사를 해서 그런 건지, 너무 초기라 아기집조차 보이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자궁벽이 두꺼워진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임신 중이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임신하면 바로 입덧이 떠올랐는데, 아주 초기에는 그렇게 컨디션도 입맛도 좋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임신해 보고서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임테기의 두 줄을 확인한 그 날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임테기가 꽤나 정확하다고는 하지만 빨리 제대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오후 늦게 동네 산부인과를 찾았고, 이르긴 했지만 다행히 초음파 검사에서 조그맣게 아기집이 보였다.


마침 며칠 뒤 대학병원 검진 예약이 잡혀있었고, 나는 임신 사실을 의사에게 전했다. 의사는, 수술 전에 임신이 되는 게 가장 좋은 케이스라고 너무 잘됐다고 했다. (엥? 악성이면 임신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수술부터 하라고 했던 게 누구더라? 한국 대학병원도 그렇고 의사들에 대한 신뢰가 갈수록 흔들린다.)

속으로 좀 황당했지만 뭐 수술을 안 해도 되니 어쨌든 좋았다. 임신 중에는 생리를 안 하니 낭종은 더 커지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임신 중이나 출산 시에 혹시 낭종이 터질 수도 있으니 가능하면 대학병원에서 출산하기를 권했다.


나는 또 동네병원으로 가서 의사의 소개장을 받았다. 같은 대학병원이지만 부인과와 산부인과는 달랐기에 소개장을 다시 받아야 했던 것이다.

소개장 한 번 받을 때마다 3천 엔씩 내야 하는데 그냥 부인과에서 산부인과로 바로 넘겨주면 덧나나. 일본은 그런 쪽으로는 참 융통성이 없다.


어쨌거나 첫째 아이는 그렇게 최고의 타이밍에 우리를 찾아와 주었다.



모자수첩과 정기검진


일본에서는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지역 보건센터로 가면 모자수첩이라는 것을 준다.

임신기간 중 검진 기록부터 아이의 출생 기록, 각종 검진과 예방 접종에 관한 모든 기록이 다 담기는 수첩이므로 성장기 내내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외출 시에도 꼭 지니고 다니는 게 일반적이다.

왼쪽이 첫째, 오른쪽이 둘째의 모자수첩. 3년 새 디자인이 바뀌었다.

이 모자수첩과 함께 정기검진 시에 쓸 수 있는 티켓이 담긴 별책을 받게 되는 데, 정기검진 때 모자수첩과 함께 이 별책을 제출하면 병원에서 알아서 티켓을 떼어간다.

그렇다고 검진 비용이 전부 무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병원에 따라 청구되는 금액이 다르긴 하지만, 티켓으로 커버되는 검사 항목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한다.


첫째 때 다니던 대학병원에서는 별다른 검사가 없는 날은 천 엔 정도를 냈고, 정밀 검사 시에는 만 엔이 넘는 비용을 지불해야 될 때도 있었다.

둘째 때 다니던 동네 산부인과는 아예 비용 청구가 없는 날도 있었지만, 대체로 3천 엔 이상씩은 꼬박꼬박 지불했다.

첫째 때는 의료비를 기록해 둔 자료가 없어 정확히 얼마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둘째 때 임신 확인부터 출산 직전까지 병원에 다니면서 쓴 돈이 5만 엔이 넘는다. 첫째 때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티켓으로 지원되는 검사항목이나 금액이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고 하니 일괄적으로 이야기하기는 힘들지만 정기검진만으로도 꽤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지자체에서 지원을 해준다고는 하나 정말 돈이 없으면 아이도 못 낳겠다는 생각이 든다. (출산비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겠다.)


티켓은 보통 예정일까지 쓰면 딱 맞게끔 되어있는데 출산이 늦어지는 경우, 티켓을 다 소진해 자비로 정기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내 경우 첫째는 마지막 티켓까지 다 쓰고 예정일 다음 날에 태어났고, 둘째 때는 양수가 터져 입원하는 바람에 마지막 티켓 한 장이 남았다.


왼쪽이 표지, 오른쪽이 둘째 때 쓰고 남은 마지막 티켓이다. A, B, C-1, C-2 네 종류가 있는데 검진 단계에 따라 병원에서 필요한 것을 떼어가는 식이다.


정기검진은 비슷한 패턴으로 진행되었다. 병원에 도착해 접수를 마치면 임산부가 알아서 혈압과 체중을 재고, 소변을 채취해 화장실 내에 있는 작은 창문을 통해 제출한다. 혈압과 체중을 기록한 종이는 나중에 간호사에게 제출한다.


대학병원의 경우 예약한 날짜와 시간에 검진을 받으러 갔다. 시간이 정해졌다고는 하나 15분 단위의 빡빡한 스케줄이었기에 환자는 계속 뒤로 밀리고 기본 한 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했다.

또한 주치의 개념이 없이 그날그날 담당인 의사가 진료를 보는 시스템이었다. 항상 여의사였기에 출산 때도 당연히 여의사가 받아주는 줄 알았는데 처음 보는 남자 의사가 등장해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동네 산부인과는 병원마다 다르긴 한데, 내가 다니는 곳은 따로 예약을 받지 않았다. 예약제가 아닌 만큼 붐비는 시간에 가면 대기시간도 길었다.

특히 토요일은 직장을 다니거나 남편과 동행한 임산부들이 모이는 날이라 가장 붐볐고, 대기 시간이 기본 두 시간, 길면 세 시간까지도 걸렸다.

나도 초기에는 남편과 같이 가기 위해 토요일을 택했다. 근처에 공원이 있어 대기시간에 큰 아이와 놀다 오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행여 비라도 오는 날이면 공원에 나가 놀 수 없었고, 그러면 기나긴 대기 시간 동안 큰 아이의 에너지를 받아주기가 힘들었다. 병원에 장난감과 그림책이 있긴 했지만 금방 질려했고, 고래밥과 곰돌이 젤리와 호빵맨 주스로 돌려 막기 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토요일의 황금 같은 두세 시간을 산부인과에서 보내는 게 너무 아깝기도 했다.

한 번은 빨리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접수 시작 시간에 맞춰갔는데 내 앞으로 벌써 20명 이상이 접수를 끝내고 병원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이런 부지런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결국 남편은 가끔 연차를 내어 검진에 함께 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나 혼자 큰 아이를 데리고 평일에 가기로 했다. 임신한 몸으로 큰 아이를 데리고 혼자 병원에 가는 게 처음에는 힘들기도 했지만 평일에는 빠르면 한 시간 내로 끝낼 수 있었기에 그 편이 아이도 나도 덜 지치긴 했다.


대학병원과 동네 산부인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조산사의 역할이었다.

대학병원에서는 의사의 검진이 끝나면 반드시 조산사와의 면담을 거쳐 다음 예약을 잡았다. 그만큼을 또 기다려야 하긴 했지만, 그 시간을 통해 궁금한 것들을 편하게 물어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좋았다.

반면에 동네 산부인과는 따로 조산사를 거치지 않았기에 궁금한 게 있으면 의사에게 직접 물어야 했다. 다행히 담당 의사가 인상 좋고 친절한 분이셨기에 큰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지만,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산모들을 생각하면 마음 편히 무언가를 물어보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3대 굴욕과 무통분만


출산을 앞두고 한국 포털 사이트에서 찾아본 출산 후기에는 대부분 산모의 3대 굴욕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제모와 관장 그리고 내진이었다.

내가 출산을 경험 한 두 병원에서는 그중 두 가지인 제모와 관장을 하지 않았다. 뭐랄까, 인위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출산을 진행시키는 듯했다.

이것이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게, 같은 맥락으로 일본에서는 무통분만이 흔하지 않다. 무통분만이 가능한 병원 자체도 많지 않고 비용도 비싸다.


2017년에 일본산부인과의회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일본에서 무통분만을 시행하는 병원은 전체의 32%, 전체 분만 건수 중 무통분만은 고작 6%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무통분만 건수가 전체의 54%(2008년), 미국이 61%(2008년), 프랑스가 80%(2010년)인 것에 비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차이가 아닐 수 없다. 한국과 미국과 프랑스의 통계가 꽤 오래전 수치이니 현시점에서는 더 심하게 차이가 날 수도 있겠다.


내가 다니던 대학병원에서는 무통분만을 시행하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출산 비용보다 10만 엔 정도 더 들었기 때문에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작은 병원에서 무통분만을 시행하는 경우 마취의가 상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날짜를 정해놓고 유도분만을 한다고 했다. 비용은 대학병원과 마찬가지로 플러스 10만 엔 정도였다.

둘째를 출산한 동네 산부인과에서는 무통분만을 시행하지 않았지만, 나는 첫째도 쌩으로(?) 낳았기에 둘째도 그냥 낳기로 했다.


일본에서 무통분만이 보편화되지 않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의료사고에 대한 두려움, 비싼 비용 등)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보수적인 일본인들의 성향이 한몫하는 것 같다.


일본인들은 변화를 받아들이기보다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는 성향이 강하다.

요즘은 어떤 지 모르겠는데, 내가 대학원에 다닐 때만 해도 합격자 발표는 직접 그 학교에 가서 게시판에 붙어있는 수험표와 이름을 보고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확인해야 합격의 기쁨을 더 만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원서 배포도 마찬가지로 지망하는 학교에 직접 가서 원서를 받아오는 식이었다.

얼마 전에 알아본 바로 유치원 원서도 유치원에 가서 직접 받아와야 하는 걸 보면 여전히 위와 같은 방식을 고수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비효율적인 방식이 아닐 수 없는데 신기하게도 일본인들은 그런 방식에 좀처럼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러한 연유로 일본인들은 출산의 아픔조차 당연히 겪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아픔을 온전히 겪고 아이를

출산해야 아이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물론 모든 일본인이 그런 것은 아니다. 내 주변에 무통분만을 한 사람도 있고, 젊은 층으로 갈수록 여성으로서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는 인식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더러 있긴 하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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