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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그릇 Oct 08. 2019

수학 전공자의 가계부 사랑

나는 가계부를 쓰면서 수학 문제를 푼다

요즘 부쩍 체력이 좋아진 첫째는 아침 8시 즈음 일어나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노는 데도 밤 10시가 다 되어야 간신히 잠이 든다. 조금이라도 더 체력을 소모하게 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하지만 짬을 내기가 쉽지 않다.

아침 먹은 것을 정리하고, 빨래를 돌리고, 둘째에게 이유식과 분유를 먹이고, 칭얼거리는 둘째를 안아주다가 다 된 빨래를 널고, 다시 둘째를 안아 오전 낮잠을 재우고 나면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부랴부랴 점심을 준비해 첫째와 함께 먹고 설거지를 하려는 즈음 둘째가 잠에서 깬다. 둘째를 아기 의자나 점퍼루에 앉혀놓고 설거지와 뒷정리를 마치고 나면 약간의 여유가 생기지만, 좀 있으면 둘째가 배고파할 시간이라 놀이터에 나가기가 애매하다. 그 틈에 잠시 누워있을라 치면 첫째가 수시로 나를 부른다.


'엄마! 응가하고 싶어.'

'엄마! 쉬 하고 싶어.'


아니, 불과 10분 전에 응가를 했는데 그때 왜 쉬를 같이 하지 않은 건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이에게 따져 물을 수는 없다.

그렇게 화장실 셔틀을 몇 번 하다 보면 슬슬 배가 고파진 둘째가 칭얼거리기 시작한다. 둘째에게 분유를 먹이고 다시 낮잠을 재우고 나면 저녁 준비를 시작한다. 쌀을 씻어 밥통에 넣고 예약 버튼을 누른 다음, 그 날 메뉴에 맞춰 미리 할 수 있는 준비를 최대한 해 놓는다.

둘째가 깨면 그제야 놀이터에 나가보지만, 해가 짧은 일본에서는 이미 뉘엿뉘엿 해가 기울어 그림자가 길게 꼬리를 빼어 무는 시간이 되고 만다. 놀이터에서 한 시간도 채 놀지 못하고 돌아온 첫째는 저녁을 먹고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도 방금 건져 올린 활어처럼 파닥파닥 생기를 잃지 않는다. 부럽기 그지없다.  

심지어 오늘은 제 입으로 졸리다고 해서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잠들기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 혼자서 한참을 중얼중얼하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춤을 추고 다시 누워서 뒹굴뒹굴하다가 크게 하품을 한 번 하더니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나와서 시계를 보니 역시나 9시 56분. 쓰러져 자고 싶지만, 그래도 하루 중 유일하게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간을 포기할 수 없다. 서랍에서 노트북을 주섬주섬 꺼내 식탁에 앉는다.




노트북을 켜면 가장 먼저 가계부 파일을 열어본다.

지출이 있는 날은 지출내역을 입력하고 가계부상의 잔액과 실제 잔액이 맞는 지를 확인한다. 이 작업이 끝나야 비로소 나의 하루가 마무리된 느낌이 든다.


가정주부로서의 의무감도 있지만, 사실 나는 가계부 들여다보기를 좋아한다.

지출이 없는 날도 습관적으로 가계부 파일을 열어 놓고, 이번 달 생활비는 얼마가 남았는지, 남은 생활비로 살아가려면 장보기 예산을 어떻게 쪼개 써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월급날인 25일이 가까워오면 다음 달 예산을 세운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은 1원 단위까지 똑같은 금액이고, 지출 항목들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세세하게 조정해서 예산을 세워야 할 것들이 있다.

주말이 5번 끼는 달은 특히 머리가 아프다.

아이들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주말에 장을 몰아서 보는 편이다(평일에 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장보기는 매우 어려운 미션인 데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유발하여 가정의 평화를 헤칠 수 있다). 주말에는 상황에 따라 외식을 하기도 하고 온 가족이 함께 산책을 하거나 마트를 돌아다니다 보면 중간중간 쉬면서 간식도 먹어줘야 한다. 따라서 식비 지출의 대부분은 주말에 발생한다. 주말이 5번 있다는 것은 곧 식비 지출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것을 감안해서 예산을 세워야 한다.

금액이 큰 생활용품을 사야 하는 달에는 생활용품의 예산을 늘리고 그만큼을 다른 항목(대체로 식비)에서 줄여야 한다.

  

이렇게 촘촘하게 예산을 세워도 항상 예상외의 지출이 발생한다.

주로 의료비가 그렇다. 예고하고 아픈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경우는 시에서 보조를 해주기 때문에 병원에 가도 300엔만 내면 되고 약값도 무료라서 크게 부담이 되지 않지만, 남편이나 내가 병원에 가면 약값까지 해서 기본 2-3000엔은 깨진다.

우리가 주로 가는 곳은 치과다. 충치가 없다고 자랑하던 남편은 만성적인 치주염으로 발치까지 해야 했고, 노트북 몇 대 값을 충치치료에 헌납하고 겨우 식생활에 가능해진 나는 말할 것도 없다. 올해만 치과치료에 3만 엔 이상을 썼다.


이런 식의 예상외 지출이 발생할 경우 대처방법은 두 가지다. 생활비를 그만큼 아껴서 메꾸거나 다른 통장에서 가져다 쓰는 것이다.

이미 촘촘하다 못해 숨구멍이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예산을 세워놨기에 더 줄일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두 번째 방법인 다른 통장에서 가져다 쓰기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말한 다른 통장은 남편과 내가 ‘저수지’라고 부르는 통장이다. 저축과는 좀 다른 개념으로, 여유자금(주로 상여금의 일부)이 있을 때 넣어놓고 부족할 때 가져다 쓰는 용도이다. 한 때는 이 저수지가 제법 차 있어 마음 한 구석이 든든했으나, 첫째와 둘째의 임신과 출산으로 급격하게 고갈되어 이제는 바닥을 보이고 있다.


저수지와는 별도로 가전제품 구매를 위한 별도의 저축을 하고 있는데 이 방법은 꽤 추천할 만하다. 한 달에 적은 금액씩이라도 적립을 해두면 갑작스럽게 가전제품이 고장 나 목돈을 지출해야 하는 당황스러움을 면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저축한 돈으로 우리는 올해 초 세탁기를 새로 구매했다.

내가 기숙사에서 나와 자취를 시작하며 샀던 세탁기는 11년 동안 쉬지 않고 나와 남편과 큰 아이의 옷까지 세탁해주었지만, 11년째 되던 해에 드디어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탈수로 넘어가기 전에 락이 걸려야 하는데 솔레노이드라는 부품의 고장으로 락이 반만 걸린 상태로 계속 ‘철컥철컥’ 소리만 내다가 곧 에러가 나서 ‘삐-삐-’ 하고 울어대는 것이었다.

처음 그렇게 됐을 때는 빨래가 되다 만 상태로 세탁기 문은 안 열리고, 전원을 끄고 한참 기다려야만 락이 해제되어 무척 당황했었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니던가. 전원을 끈 상태로 재빠르게 세탁기 문을 당기면 열린다는 것과 다시 전원을 켜서 원하는 코스를 설정하고 문을 닫으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세탁 중간중간 에러가 날 때마다 오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 그 상태로도 한참을 더 썼다.

그러다가 둘째 출산을 앞두고, 신생아를 돌보면서 도저히 그 짓은 못하겠다는 생각에 새로 구매하기로 한 것이다. 건조기능이 있는 드럼 세탁기가 탐이 났지만, 일반 세탁기에 비해 두 배 정도 비쌌다. 우리의 저축액은 일반 세탁기를 사기에도 약간 모자랐기에 드럼 세탁기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돈이 모자라면 불편함을 감수하면 된다. 그것이 나의 지론이다.



내가 가계부를 쓰는 가장 큰 목적은 당연히 '절약'이다. 절약을 위해서는 먼저 소비를 파악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디에 얼마를 쓰고 있는지를 알아야 어디에서 얼마를 줄일지를 결정할 수 있다.


수기로 시작한 가계부가 엑셀 파일이 되면서 구체적인 항목이나 양식을 내가 쓰기 편하게 편집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식비로 뭉뚱그려 기록하던 것을 장보기와 외식과 간식으로 나누어 기록하면서 야금야금 사 먹는 간식이 뭉치면 얼마나 큰 금액이 되는지 알게 되었고, 그것은 곧 절제로 이어졌다.


소비가 파악이 되면 예산을 세우게 되고, 예산에 없는 지출은 하지 않도록 노력하게 된다. 마트를 구경하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어도 예산이 없으면 사지 않는다. 정말 마음에 들고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사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그럴 때는 최대한 다른 항목을 줄여 예산 안에서 해결하려고 용을 쓴다.


몇 년 전에는 휴대전화 요금을 줄이기 위해 남편과 함께 SIM 프리로 갈아탔는데 처음에 단말기를 구입할 때 목돈이 들어갔다. 매달 지출되는 전화 요금은 대폭 줄었지만 줄어든 금액만큼 다른 곳에 써버린다면 절약의 의미가 없고 단말기 구매비용만 별도로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원래 지불하던 휴대전화 요금과 줄어든 휴대전화 요금의 차액만큼을 매달 저수지 통장에 넣었고, 그것이 누적되어 단말기 구매비용을 전액 메꾼 다음에는 그 차액만큼 적금을 늘렸다. 물론 그 과정도 전부 가계부에 기록하고 관리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가 엄청난 짠순이에 절약정신이 투철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남편도 나도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라 허투루 돈 쓰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미래의 행복만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마냥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본에 살면서 월급의 1/3을 월세로 내고 약간의 저축을 하고 나머지를 생활비로 쓰는 데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1년에 저축액 5천엔 올리기가 쉽지 않다. 은행이자도 거의 없는 판에 5천 엔씩 더 저축한다고 나중에 큰 부자가 될 것도 아니고, 그 돈으로 아이가 좋아하는 과일을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사주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보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1년에 한 번씩은 가까운 곳으로라도 가족 여행을 가고, 가끔씩은 수족관과 동물원으로 나들이를 가며, 육아와 가사에 지칠 때는 한 번씩 밖에서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삶을 살고 싶다.


물론 그런 소소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쓸데없는 소비를 줄이는 것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 가계부를 쓰고 있기도 하지만, 나에게 가계부는 단순히 절약을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절약을 위해서 의무감으로 가계부를 쓴다면 나는 이 궁상맞음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나는 가계부를 쓰는 과정이 즐겁다. 어떤 날은 몇 시간씩 가계부를 들여다보며 좀 더 효율적으로 기록하고 관리할 수 없을까 고민한다.

처음에는 수입과 지출만을 기록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가계부 상의 잔액과 실제 잔액에 오차가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떻게 하면

(지난달 잔액 + 이번달 수입) - 이번달 지출 = 이번달 잔액

의 계산이 오차 없이 딱딱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현금 잔액과 더불어 월급 통장과 카드값이 빠져나가는 통장의 잔고를 함께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산이 부족하여 기존 통장에서 빼 쓰는 경우, 수입은 없고 지출만 발생하게 되므로 위의 수식으로는 돈의 흐름을 제대로 기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난달 잔액 + 이번달 수입 + 추가 예산)  - 이번달 지출 = 이번 달 잔액

으로 수식을 변경하고 통장 잔고의 변화도 함께 기록하여 관리하기 시작했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엑셀로 나름의 양식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데, 이제는 매일의 지출만 제대로 기록하면 가계부 상의 잔액과 실제 잔액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매월 말 가계부를 결산하면서 이 숫자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때의 짜릿함이란! 금액이 맞지 않을 때는 어디에서 오차가 생겼는지는 추적하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다.


실현 가능하면서도 타당한 수준의 예산을 세우고 거기에 맞춰 지출을 해나가는 과정도 의외로 흥미진진하다.

식재료 구매에는 옵션이 많다. 여유가 있을 때는 국산 밀가루로 만든 빵과, 국산 콩으로 만든 두부를 산다. 예산이 부족할 때는 수입산 밀가루로 만든 빵과 중국산 콩으로 만든 두부를 산다. 그래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다. 대신에 외식과 가공식품의 소비를 줄이고 제철 채소를 사다가 집에서 요리해 먹는다. 어차피 밖에서 먹으면 국산이 아닌 것들이 대부분이다. 모든 것들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할 수는 없다. 적당히 타협할 것들은 타협하고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은 지킨다.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나에게 있어 마치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나는 고등학교 때 수학 문제 푸는 것을 좋아했다. 학습 시간의 50% 이상을 수학 공부에 투자했는데 수학 점수를 올리겠다는 목적보다는 수학의 정석을 푸는 게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다. 특히 약간 난이도가 있는 단원 마무리 문제를 붙잡고 며칠씩 고민하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저렇게 풀이를 해보다가 마침내 해답을 찾았을 때 느껴지는 희열은 뭐라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때 풀었던 문제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간단한 것이지만,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사실 여러 가지 과제가 주어진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마트에서 키위 할인 행사를 하고 있다. 낱개로 사면 개당 100엔인데, 묶음으로 사면 14개에 1000엔이란다. 당연히 묶음으로 사는 편이 단가는 훨씬 싸다. 하지만 잘 따져봐야 한다. 14개짜리 묶음을 사서 하루에 1개씩 먹으면 2주를 먹을 수 있다. 하지만 2주 안에 키위가 상할 가능성과 넉넉히 샀다는 생각에 하루에 2-3개씩 먹을 가능성, 매일 키위를 줬더니 입맛이 까다로운 첫째가 싫다고 다른 과일을 찾게 될 가능성 등을 고려해 본다면, 1000엔짜리 키위는 일주일 이내에 다 소모하고 심지어 다른 과일을 더 사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키위를 낱개로 3-4개 사고 다른 과일을 조금 더 사서 번갈아 가며 먹는 편이 식비가 적게 들 수 있다.


현명한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식재료의 단가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 식비 절약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어 좋기도 하지만, 나는 이렇게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고 때로는 꼼꼼하게 계산기를 두드려 최적의 결론을 도출하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즐겁다.


물론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가정주부들이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팍팍한 살림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은 때로는 짜증 나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관점을 달리해보면 즐거운 문제 해결의 과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진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생긴다면 절약을 위해 고민하며 보낸 지금의 이 시간들이 그리워질 것 같다.

부디 가족을 위해 애쓰시는 주부님들이 조금이라도 이 과정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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