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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그릇 Sep 18. 2019

11. 엄마가 보고 싶은 나는 약자다

결핍과 그리움

아침부터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 품에서 잠든 둘째를 살포시 내려놓고 나도 그 옆에 누웠다. 다행히도 첫째는 혼자만의 놀이에 심취해 있다. 잠시 쉴 수 있겠구나 안도하며 창문 쪽을 마주하고 누워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불현듯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눈물이 났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추석을 앞두고 여전히 엄마에게 먼저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나는 남편에게 연락 한 번 해보라고 부탁을 했다. 남편은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카톡 메시지와 함께 아이들의 사진을 몇 장 전송했고, 얼마 후 엄마가 확인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로부터는 어떠한 답신도 없었다. 평상시 엄마의 말투로 비추어 볼 때 '빨리도 연락한다'라는 식의 반가움과 질책이 섞인 한마디 정도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엄마가 카톡 메시지에 답을 안 하시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엄마 연령대의 분들이 흔히 그렇듯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입력하는 데 서툴고 시간이 걸리다 보니 답을 생략하거나 아주 짧게 보내셨다. 아이의 사진을 보내면 그저 확인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간혹 '많이 컸네. 말도 많이 늘었네.' 정도의 코멘트가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몇 달만에 온 사위의 연락에 한마디 말도 없다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남편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소심하게 내밀어 본 나의 손길에 엄마는 화답하지 않았다. 마치 내 손길이 매몰차게 거부당한 것만 같이 느껴졌다.

엄마도 단단히 마음이 상하신 걸까. 아니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답을 생략하신 걸까. 카톡 너머에 감추어진 엄마의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답답하다.



얼마 전부터 종종 꿈에 엄마가 등장했다. 어젯밤 꿈속에서도 엄마는 예의 그 무뚝뚝한 말투로 마른 나물과 같은 식재료를 챙겨주셨다.

보고 싶은 마음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무디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무의식 속에서 엄마는 여전히 보고 싶고 그리운 존재인가 보다.

가을 빗소리가 공연히 내 마음을 충동질하여 무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의식의 영역으로 스며들고 말았다.


한동안 엄마를 참 미워했었는데 지금의 내 감정은 아주 오래전, 엄마를 다시 만난 24살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보고 싶지만 만날 수 없고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존재, 엄마는 나에게 다시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맞기도 하지만, 그것이 곧 자식이 늘 강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식을 낳는 것도, 낳아서 기르거나 버리는 것도, 사랑을 주거나 학대를 하는 것도 모두 부모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 과정에서 자식은 항상 약자다. 대체로 어리고 약한 존재이기에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으며 부모의 선택에 무방비 상태로 휘둘리게 된다.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학대받은 자식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할 수 있는 복수란, 기껏해야 부모와 인연을 끊고 사는 것이지만, 애초에 자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부모에게 그것이 복수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차마 부모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살아간다. 드물지만 좋았던 기억, 따뜻했던 기억, 사랑받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 받은 기억들을 글로 옮기고 나니 기억에서는 점점 흐려져 가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좋았던 기억들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엄마가 일본에 와 있을 때 총각김치가 먹고 싶다고 했던 내 말을 기억하고 한국에 가서 총각김치를 담가 보내주신 적이 있다. 담가 달라는 말도 담가주겠다는 말도 서로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엄마의 투박한 사랑의 표현임을 알 수 있었다.

내 옷보다 남편의 옷을 더 많이 사고, 매년 가을이 되면 시댁에 사과를 택배로 보내는 것도 나를 위하는 엄마의 마음임을 안다.

그런 기억들이 내 발목을 잡아서 나는 엄마를 떠날 수도 버릴 수도 없고 무의식 속에서 그리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많은 부분들이 채워졌다고 생각했다.

출산 후에도 들어가지 않는 내 뱃살도 귀엽다고 말해주는 자상하고 다정한 남편이 옆에 있다. 엉덩이가 보들보들하고 볼이 말랑말랑한 두 아이가 사랑이 충만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준다. 내 삶의 그 어떤 순간보다도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엄마의 존재는 나에게 결핍을 안겨준다. 나의 현재를 아무리 충실하게 채워보아도 메꾸어지지 않는 커다란 구멍이 있는 듯하다. 그곳을 엄마만이 채울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엄마로 인해 상처 받지 않고 감정의 소모를 겪지 않아도 되는 일상은 편안하다. 편안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오늘처럼 이따금씩 결핍과 그리움이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날이 찾아오면 나는 거의 속수무책이다. 엄마를 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나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많은 상처와 가시 돋친 말들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저 미워하고 원망하는 감정만이 남아 있다면 그 감정을 잘 추스르고 앞으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속 그릇이 채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 나는 건전지가 떨어져 가는 장난감 기차처럼 가다가 서기를 반복한다.


엄마도 내가 보고 싶고 궁금할까. 새로운 가족들과 오순도순 지내다가도 불현듯 내 생각이 날까. 나에게 먼저 손 내밀고 싶은 생각은 없을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데 이 줄다리기에서 꼭 나를 이겨야만 할까.


분하다. 분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엄마가 보고 싶은 나는 자식이라는 이름의 약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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