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이면서,
가장 진부한 활동. 조지 슈타이너 '생각은 왜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
'생각은 왜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 세번째 챕터, 세번째 이유다. 앞서 인간의 생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리고 인류 문명에 획을 긋는 천재들이 하는 그 고도의 집중력을 보통은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슬프다는 두가지 이유를 살펴봤다. 세번째 이유는 생각이 나 자신의 고유의 것이 아니고 이전에 다른이에 의해 수없이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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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정체성의 구성요소이다. 생각이 없다면 우리 자신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나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없다. 나는 내 생각을 숨길 수 있고 속일 수도 있다. 고문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이 내 생각을 앗아갈 수는 없다. 또한 누구도 내 입장에서 내 마음을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이 다른 누구도 나 대신에 죽을 수 없는 이유이다.
시각장애인도,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도, 하반신마비로 휠체어를 타는 사람도 생각을 고양시키고 구성하고 표현하여 우주의 끝자락까지 닿게 할 수 있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의 유일하고 안전한 소유물인 셈이다.
그로부터 한가지 결과가 도출되는데, 누구도, 아무리 그가 누군가와 생물학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가깝다고 해도, 한평생을 같은 집에서 살았거나 같은 직장에서 일했다고 해도, 누구도 그 사람의 생각의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품에 누웠을 때, 사랑하는 아이를 안고 있을 때, 가장 친한 친구와 손을 잡고 있을 때,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드는지에 대해 모든 의심을 넘어서는 증거를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나를 기쁘게 하는 아이와 친구의 웃음 뒤에 지루함이나 거리감 심지어 거부감이 숨어있을지 모른다. 거짓말하는 능력이나 허구를 생각해내는 것이 인간됨의 고유한 부분 중의 하나이다. 예술이나 사회적인 행동, 언어까지도 그런 것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음의 역설이 존재한다. 이러한 우리의 고유함, 우기가 가진 것 중 가장 내적이고 개인적이고 숨겨진 우리의 고유함이 동시에 수백만번을 거듭한 진부한 것이라는 역설 말이다. 우리의 생각은 공통적이고 인간적인 공유물이다. 우리의 생각은 수없이 다른 이들에 의해서 생각되어져 왔다. 그것은 끝없이 진부하고 낡았다. 우리 생각의 요소들은 아무리 개인적이고 은밀한 행동이나 순간에서라고 해도 상투적인 표현과 반복으로 가득하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언어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물려받은, 모든 이가 그것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언어의 메트릭스에 던져져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들은 공통의 틀(Währung)에 속해있다. 문법적인 규칙이나 언어의 이전의 사용 선례같은 것들이 우리의 생각행위와 의식적인 언어표현에 선행하고 그것들을 제한했을 수 있다. 구조적인 경우의 수는 다양하지만 동시에 반복적이고 제한적이다.
그렇기에 생각에서 진정으로 고유함은, 어떤 아이디어에 대해 최초의 생각이라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드물다. 새롭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본문의 내용이 아니라 외적인 텍스트이다. 그러나 어떠한 생각이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순수 혹은 응용학문에서 혹은 기술분야에서는 가정이나 반론에 대한 교류하고 그로인해 누적된, 집합적인 발전을 가져온다. 여기에서도 많은 것은 재발견되거나 다양한 개인이나 단체에 의해 동시에 발견된다. 자연선택이나 미분학, DNA가 그에 대한 유명한 예가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 조차도 그의 일생에 걸쳐서 그만의 고유한 아이디어는 단 두가지였다고 말한다.
많은 학문 영역에서 소위 '고유함'이라고 하면 거의 형식상의, 진행과정상의, 혹은 표현방법상의 하나의 변화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발견의 가능성은 무한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인간의 문명사회에 큰 기여를 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 얼마만큼이 '고유한'것일까? 새로운 생각의 방식, 그 이전에 없던 상상력이 작가나 화가, 작곡가, 철학가들이 추구했던 열정이다.
시인들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내려고 노력했다. 그와중에 다소 이해가능한 상투적인 면이 있다. 언어형식이 완전히 새롭다면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신화라던가, 서양문학에서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위대한 고전도 주제와 변형의 결합을 통해서 생겨난 것이다. 소포클레스가 안티고네의 이야기를 처음 '생각해 낸' 것이 사실일 수 있지만, 그러한 처음은 매우 드물다.
필라톤이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생각과 상상, 은유를 완전히 고유하게 구성하고 전파할 수 있는 언어적이고 개념적인 도구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샤르트르의 '더러운 희망'의 개념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고, 그 이전에는 그러한 아이러니한 표현이 공개적으로 발화가 된 적이 없는 것 같다. 지오다노 브루노가 경계없는, 수많은 우주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두가지 경우에서도 이미 이전에 그 말을 한 사람이 있고, 몇몇은 몇천년 전 사람이다.
생각은 우리가 가진 것중 가장 고차원적인 활동이다. 가장 깊은 곳에 우리의 존재의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활동중에 가장 익숙하고, 진부하고, 반복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역설이 우리를 놓지 않는다. 이것이 생각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세번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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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단계적으로 논지를 밟아나가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흐름이라서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여러번 읽고 요약을 해보니 정리가 좀 되는 것 같다.
이전에 사진대학원에서 잠시 사진을 배운적이 있었다. 예술가가 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만두기는 했지만, 당시에 같이 작품활동을 하던 학생들 혹은 작가들 사이에서의 가장 큰 고민도 바로 그것이었다. 나만의 독창성은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내가 하는 이 작업은 독창적인가. 그리고 수없이 들었던 말도 나의 이 아이디어는 이전에도 수없이 누군가 표현해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이것이 독창적이냐 자체가 중요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리지널이 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표현상에서 아니면 다른 면에서 작은 변화를 주는 정도로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술에 대해서 깊이 들어가보면 그것이 전혀 '독창성'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된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냐는 문제였다는 것을 어느순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과 조우하는 것이다. 작품이 그렇게 자신의 가장 깊은 곳, 즉 진심에서, 진실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이 독창적이든 아니든 보는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그것이 예술의 소명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은 예술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어서 그런 관점이 들어있지는 않다. 다만 '생각'자체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생각이라는 것에 대해 잘게 다져보고 얇게 펼쳐보면서,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차근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어떤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통합적인 사고도 중요하지만, 전체를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도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생각'에 대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같다.
앞의 다른 글에서 적었듯이 나는 생각을 많이 할 수록 우울해지기는 하였다. 막연할 뿐 그 이유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였는데, 이 책을 보면서 나의 생각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같다. 앞으로의 내용도 기대가 된다.
Jeorge Steiner 'Warum Denken traurig mac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