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애초에 독일어를 배우게 된 것은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자 함이었다. 유학의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독일에 머무는 7개월 중에 내게 가장 의미있고 행복했던 시간은 기차로 독일의 지방도시에 가서 그곳의 미술관을 방문하는 경험이었다. 그 지방을 여행하며 미술관도 갔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미술관을 가기 위해 여정을 계획했었다. 독일에서 미술관은 한국에서와는 달랐다. 우선 작품들이 양적으로 많았고, 그래서 미로같은 전시실을 몇시간을 둘러보아도 모자랄 정도였기에, 그 거대한 스케일에 앞도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며 어른 할 것 없이 그림 앞에서 편안하게 감상하고 이야기하는 모습에 이들에게 예술이란 참으로 가깝고 일상적인 것이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처음 '미술관을 빌려드립니다 - 북유럽-' 이 책을 받아들고, 미술관에 대해 독일에서의 경험을 통해 갖고 있던 위와 같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북유럽은 내게는 낯설지만 궁금한 그런 곳이었기에, 북유럽 사람들은 어떤 그림을 왜 그렸을지 궁금해졌다. 그들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였을까, 하고 말이다.
내가 이전까지 그림을 감상하던 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었기에 작가나 그림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그냥 그림만을 보는 행위에 그쳤다. 그 그림이 그려진 시대 등의 배경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감상은 오롯이 그 그림이 주는 느낌만으로 그 그림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감상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보니 작품 감상이 평면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책을 통한 그림의 감상은 그러한 감상방법에서 오는 오류를 어느정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듯 하다. 25년간 유럽 현지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해오셨다는 작가 손봉기는 그의 미술과 함께한 시간 만큼이나 다양한 역사나 미술사와 더불어 각각의 작품에 얽힌 뒷이야기까지 아우르면서 작품을 좀 더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북유럽의 네나라,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의 순서로 나라별로, 그리고 그 안에서는 주요 작가별로 되어있는데, 나라별 작가 소개에 앞서 북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북유럽 신화와 문화소개가 실려있다. 이 부분이 나는 특히 마음에 들었다. 북유럽의 신화는 처음 접해보기에 생소하면서도 내가 기존에 접했던 그리스로마 신화와는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었다.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처럼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었다. '기후가 춥고 냉혹하여 힘든 삶을 지속하기보다는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는 것이 더 낫다는 북유럽 사람들의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북유럽 국가들은 행복지수 상위권에 탄탄한 복지국가로 누구나 한번쯤 살아보고픈, 적어도 알고 싶어하는 부러운 국가들이 되었지만, 역사를 통해 본 그들의 삶은 냉혹한 기후 만큼이나 척박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또한 겨울에는 해가 몇시간 동안밖에 떠 있지 않고, 여름에는 해가 거의 지지 않는 독특한 환경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삶이 우리와는 물론 우리에게 친근한 작품들 속의 서유럽과도 달랐을 것은 분명할 것 같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들어다본 북유럽 작가들의 작품들은 주로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를 아우른다. 시기적으로 프랑스에서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이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귀족에서 서민들의 삶으로 옮겨가고, 프랑스 파리가 예술의 중심지로 각국에서 그림을 배우고 싶어하는 화가들이 모여든 때인 것 같다. 이 책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화가들이 프랑스나 드물게는 독일에서 유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책속의 작품들은 서유럽의 그것과 닮아있으면서도 북유럽만의 것을 담고 있기도 하였다.
처음으로 소개된 나라인 스웨덴에서 처음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안데르스 소른의 '여름휴가'라는 작품이었다. 짧은 유럽생활의 경험으로 내게 익숙한 푸르른 자연과 청명한 하늘의 이미지의 서유럽과는 다른 무채색의 풍경과 눈이 튀어나오게 하는 물결과 옷의 질감의 표현이 놀라웠다.
19세기말의 여성화가들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없는데, 적어도 지금보다는 여성의 교육이 자유롭지 않을 때일텐데 그림을 그리고, 파리에서 유학을 하고 화가로 명성을 날린 화가가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책속에는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더러 성공한 여성화가들의 작품도 소개되어 있다.
이 책 전체를 통털어서 아는 작가가 한명이었는데 바로 에드바르 뭉크였다. 노르웨이 작가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책에 실린 그의 몇몇 작품을 보니 그가 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니를 어린나이에 여의고 누나 중 한명도 결핵으로 죽으면서 그이 어두운 작품세계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빌헬름 함메르쇠이, '바닥에 햇빛이 비치는 스트란트가드의 거실', '클라비어를 연주하는 소녀가 있는 실내'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덴마크의 몇몇 작가들이었다. 무채색에 가까운 색조에 인물의 뒷모습을 그린 위의 그림들은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이 두 그림은 1988년도의 영화 가브리엘 엑셀의 '바베트의 만찬'을 떠올리게 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영화도 덴마크 영화다.
칼 빌헬름 홀소에, '창가에서'
뒤이어 나오는 칼 칼 빌헬름 홀소에라는 작가의 작품도 좋았다.
제한된 글에서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외에도 많은 작가의 작품들이 나의 시선을 끌고 마음을 머물게 했다. 북유럽에 언젠가 가게된다면 꼭 미술관에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각각의 나라 작가들의 소개가 끝나면 그 나라를 여행할때 가보면 좋을 미술관을 비롯한 예술과 연관된 장소가 소개되어 있으니 북유럽 여행시에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북유럽의 그림에 푹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앞서 자세히 적지는 않았지만, 또 한편으로 인상적이었던 점은 그림이 당시 살았던 민중들의 삶과 많은 연관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당시의 북유럽 국가들은 인근의 나라와 동맹을 맺거나 혹은 다른 나라에 의해 지배를 받거나 전쟁을 치르는 등 혹독한 시기를 겪기도 했다. 황폐해진 나라의 절망한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던 것도 예술이었다. 예술은 때로는 비참한 삶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기도 하고, 지금은 황폐해져버린 땅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되살려주기도 하면서 민중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예술을 통해 그러한 민중들의 삶속에 침잠하고, 그리고 내 안의 깊은 내면에 빠져드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