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글을 쓰는 걸까. 각자 개개인마다 서로다른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려고 쓰기도 하고, 읽은 것을 기록해두기위해 쓰기도 한다. 내가 쓴 글이 나의 창작물이라는 점도 좋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이가 읽고, 읽은 이가 공감을 하고, 그와 어떤 점에서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도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글쓰기가 몰입의 시간이라는 점인 것 같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가 되기도 하고, 글에 파뭍혀 나를 잊기도 한다. 그것은 참으로 묘한 경험이다.
글쓰기는 책읽기와 쉽게 연결된다. 순수한 창작이 어렵기에 책을 통해 글감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특히 지난한 육아의 시간동안 글쓰기가 나를 살렸다고 말하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오늘은 살기 위해 글을 쓴 또 한명의 작가의 책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바로 조소연의 '태어나는 말들'이다.
제11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사실 11회 브런치북 대상 발표할 무렵이 내가 막 브런치를 시작할 때라서 당선작들을 관심있게 살펴보았었다. 이 작가의 글도 초반 몇편을 읽어보기도 했다. 끝까지 읽지 않았던 것은 우선 난 책으로 뭔가 '완결'되어 엮어진 글을 읽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나는 뭔가 좀 샘이 났던 것 같다. 나도 나의 이야기를 써서 내년 브런치북 공모를 할때 응모해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며칠을 가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내 안의 이야기는 아직 글이 될만큼 영글지 못한 모양이다.
여튼 이 책은 작가가 어머니의 자살을 겪고 그 폭력적인 일을 이해해나가는 과정 속의 생각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충격적인 소재인만큼이나 작가의 글 또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슬퍼런' 느낌인데, 작가는 이 글을 쓸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왜 써야할까, 자문자답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쓰고 싶다는 것 외에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고싶다'는 것만큼 강한 동기도 없어보인다. 그것이 작가가 책에서 말한 '자유'아니겠는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은 작가의 관점이다. 독자로서 나는 이 글을 왜 읽어야할까. 이 책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만 다루었다면 굳이 읽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한국사회의 억눌린 여성의 존재에 대한 고찰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의를 발견한다. 비인권적인 행위의 은폐를 강요받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너무도 많이 일어났던 일일거라 생각한다. 그것이 꼭 여성에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약자에 대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책속에서 그러한 고통의 연결고리는 어머니에게서 제주의 4.3사건의 희생자에게로 향한다. (억눌린 여성성에 대한 고찰은 좀 더 깊이 끌고나가도 좋을 것 같다. 우리사회는 어떤 것을 은폐하는 것에 대해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할 때가 많다. )
사실 제주에서의 이야기가 담긴 세번째 챕터는 묘했다. 앞의 두 챕터는 마치 굿을 하듯이 날이 서있고, 펜이 아닌 칼로 쓴듯, 날카롭고 빠른 호흡의 글들이었다면 세번째 챕터는 꿈을 꾸듯 몽롱하고 부유하듯 느릿느릿하다. 작가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죽고나서 제주에서 다시 환생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비유적이지만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좀 두서없이 적었는데, 사실 책에 대해서 뭐라고 평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날이 서있고 흘러넘치는 비유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마치 내가 써야할 글처럼, 마치 나의 이야기처럼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얼마전에 귀가 트이는 영어에서 counterpart라는 단어를 배웠다. 다른 장소나 상황에서 동급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그날 기사에서는 업무적 번아웃에 대응하여 육아에서의 번아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녀의 이야기가 나의 counterpart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아니지만 수능을 보던날 교통사고로 동생을 떠나보냈고, 작가는 어머니와 연인을 잃었지만, 나는 비슷한 시기에 동생과 할머니를 잃으므로 해서 강제적으로 나의 유년과 작별해야했다. 출판일을 하며 영화속에서 도피처를 찾았듯이 나도 마찬가지다. 언어공부속에 파묻히고 또한 영화는 나의 도피처이기도 했다. 작가가 새로운 터전을 잡은 제주에서 나는 2년 4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강제로 나의 유년이 끝나고 어른이 되기를 요구받았지만 나는 서른이 되기까지도 사회적으로 어른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할 무렵 그 사회적 관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택한 곳이 제주도였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한다. 나의 이야기는 읽힐만한 글인가? 나는 나의 이야기를 쓰고싶은가? 확신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혼자 제주에 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찾아서, 자유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