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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테머 Oct 02. 2019

29세, 초보 사장님 라이프

- 옷가게를 열다.

"이 가게들 다 같이 하시는 거예요?"

-옷가게를 열다.


 그래, 흔치 않은 일이다.

한 건물에 친구들이 쪼르르 자리를 잡고 가게를 차린다는 건.


 나는 옷을 판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외 각국의 빈티지 의류를 수입하여 판다.

소위 '세컨핸드'라 불리는 구제 옷부터, 판매되지 않고 재고로 쌓여있던 새 옷들까지 독특하고 질이 좋은 옷들이다.

"어쩌다 해외 빈티지 옷까지 팔게 됐어?"라는 질문에 답을 하자면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명품 브랜드의 디자이너가 직접 만든 바비인형의 옷, 진짜 옷과 다를 바 없는 바비인형 패션의 디테일함에 한껏 매료된 스물네 살의 나는 해외의 컬렉터들을 통해 인형을 하나 둘 사기 시작했다. 가격도 꽤 나가고 새 제품도 아니었지만, 소장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사실 그것도 그거지만, 나는 뭐 하나에 꽂히면 하고 마는 성격이기도 하다.- 가지고 싶은 게 워낙 대중적이지 않은 물건이기도 하고, 국내에는 판매하는 곳이 거의 없었기에 직접 검색하고, 찾아보고, 해외의 셀러들과 연락해 인형을 사곤 했다.

뜬금없지만 그러던  이별을 했다. 공교롭게도 그즈음 일까지 그만두게 되었고, 일도 사랑도 멈추게 되니 자연스레 쓸데없는 생각만 많아졌다. 이성적이기보단 감성적인 타입이라 극도로 우울감에 빠진 나는 거진  달을 외출도 하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그냥  싫었다' 말이 가장 맞는 표현일 것이다. 불행  다행히도  우울감에서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때쯤 바비인형 구매대행 사업을 시작했다. 몰두할 일이 필요했고,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줄곧 인형을 사들였으니,   같은 누군가가 바비인형을 사고는 싶은데 어디서 어떻게 사야 할지 모를  내가 대신 사서 보내주는 심부름 정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은 대박이 터진  아니지만, 입점 제안도 들어오고, 간간이 방송사의 문의도 들어오는  소소한 용돈 벌이는   있을 정도의 자리가 잡혔다. 이제 내게 해외에서 물건을 사는  정도는 익숙한 일이  것이다.


 대학교 3학년 때, 휴학을 하고 잡지사의 패션팀 어시스턴트로 일한 적이 있다. 특출 나게 패셔너블하거나 패션에 엄청난 뜻을 품은 건 아니었다. '반드시 패션업계에서 한 획을 그을 거야'라는 호기로운 마음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순히 '경험할 수 있는 건 다 경험해보자.' 정도의 마음가짐이었고, 이왕이면 관심분야가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바로 합격했다.

나름 국내 패션잡지 업계에서 메이저로 손꼽히는 잡지 중 하나였으니, 일을 하다 자연스레 새로운 기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얻게 된 기회로 꽤 오래 스타일리스트팀에서 일을 했다. 잡지, 광고, TV, 셀러브리티 전담 스타일링까지. 잡지사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일을 하며 나는 옷이 점점 더 좋아졌고, 재미있었다.

그 당시의 내 이야기를 하자면 할 말이 많으니, 이건 나중에 차차 하는 걸로 하자.


 어쨌든, 옷을 좋아하는 나는 소위 말하는 '흔해빠진 옷'을 되도록 피하고자 하는 편이다. 길가다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발견하기라도 하는 순간의 그 낯 뜨거움은 누구의 몫이란 말인가! 그런 상황에 직면하는 건 피하고자 한 일종의 노력 중 하나가 '찾기' 또 하나는 '뒤지기'. 찾고, 뒤져서 입었다. 엄마 옷도 입고, 아빠 옷도 입고, 할머니들 옷 파는 가게에 들어가 옷을 사보기도 하고, 국내에 없는 해외 브랜드 사이트에서 주문도 해보고.

그렇게 다양한 옷을 뒤져가며 든 생각.


세상엔 예쁜 옷이 생각보다 너무 많다.


 이렇게만 설명하고 끝내기엔 다소 짧지만, 이게 "어쩌다" 해외 빈티지 옷까지 팔게 된 내 함축된 이야기다!

"해외 직구를 부업으로 삼고 있는 옷을 좋아하는 20대의 여자, 옷가게를 차리다!"정도?




 -동업을 꿈꾸던 친구의 옆 가게.


 우리는 9살에 만나 친구가 되었다. 성인이 되어 각자 다른 삶을 살면서도, 언젠가는 카페를 차려 같이 운영하며 매력적인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이야기를 줄곧 나누곤 했다. 입버릇처럼 그냥 하는 말이라기에는 꽤 구체적이었고, 실현하는 중이었다. 한 때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함께 매니저로 일했던 적도 있었고, 매장을 떠나서도 각자 꾸준히 커피일을 했다. 인테리어에 대한 이야기, 콘셉트에 대한 이야기, 카페 이름 등 생산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분기별로 각종 커피 박람회나 카페쇼도 부지런히 다니면서 우리는 미래의 가게를 그려보곤 했다. 진지하고 무겁게 카페에 대한 미래를 그렸던 우리는 '나도 나중에 카페나 차릴까' 하고 쉽게 말하는 부류를 가장 싫어했고, 그들을 욕하는 것으로 대화를 끝맺음 한 날도 많았다. 우리가 그리는 미래가 그런 부류의 사람들 때문에 덩달아 가벼워지는 느낌이 싫기도 했고, 우후죽순 생겨나는 카페들 중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사람들의 카페에 실망하고,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많아서였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렇듯 모든 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가장 흔하지만 진리라고 여겨지는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또 한 번 내 삶에 등장한 것이다. 친구에게 가게를 차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그 '때'에 나는 맞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카페'는 잠시 미뤄두고 각자 다른 시작을 했다.


 그녀는 만나게 될 손님들의 삶 중 어느 한 부분에 이 카페도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담아 'Part Of You', POY라는 귀여운 이름의 작은 카페를 차렸다. -여기서 살짝 덧붙이자면 이름을 짓는 데에 나도 일조했다. 하하.- 구리시, 학창 시절 10년을 보낸 동네의 어느 골목이다.


 그때 즈음, 서브 잡으로 제법 재미를 본 나는 또 하나의 서브 잡을 생각 중이었다. 사업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가득했으나 준비되지 않은 나의 금전 상태와, '위험부담을 온전히 떠안고 시작할 만큼의 깡' 부족으로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도 들어올 때 도전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온라인 판매를 목적으로 일단 집에서 소소하게 시작해볼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상 공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 여기저기 사무실 겸 가게를 알아보고 다녔다.


 그 날 역시 엄마와 함께 광장동의 어느 옷 가게 자리를 보고 오는 중이었다.


 평수는 작지만 아파트 단지 입구의 상가 1층이라 주목도가 높고, 당시 단골손님도 꽤 있는 옷가게 자리여서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예상에 없던 권리금 이야기가 나왔다. 생각지 않은 전개에 일단 생각을 좀 해보겠다고 하고 발길을 돌려 고민도 할 겸 엄마에게 친구네 가게도 구경시켜줄 겸 그 길로 POY에 들렀다. 나는 구구절절 친구에게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그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본인 카페 바로 옆 공실로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광장동은 무슨 광장동이냐며, 익숙한 동네가 최고라며. 너는 본업도 병행해야 하니 자리를 비울 때 오는 택배는 본인이다 받아주겠다며...

어? 제법 솔깃한 제안이다. 옆 가게에 친구가 있다는 메리트는 분명하고 확실하니까! 구경이라도 해보자 하여 들어가 보니, 웬걸? 이건 생각보다 너무 좋은 거다. 공실이지만 상태도 괜찮았고 크기도 조금 전 보고 온 가게의 두배 정도는 되었다.-게다가 엄마는 이 친구를 굉장히 신뢰한다.- 현재는 오래된 주택가의 뒷골목이라 주목도가 낮지만, 내년이면 바로 옆에 아파트가 생기는 변수도 있다. 정문 쪽은 아니지만 이 골목을 따라 차가 드나드는 쪽문이라고 하니 월세가 오르기 전에 미리 들어오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결국 나의 쇼룸은 그녀의 옆 가게로 낙찰!


 -내 옆 가게로 들어온 10년 지기


 2006년, 철이 없어도 너무 없던 고등학교 1학년 때. 그 날은 석식 시간 즈음의 저녁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석식을 먹지 않고 학교 구령대에 올라 노닥거리던 저녁 시간이었다.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다이어트를 한다고 까불던 우리 몇몇은 당시 뭘 위해서인지 몰라도 춤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우리 옆을 지나가던 그녀. 현재 내 옆에서 뷰티숍을 하는 그 친구다. 그게 내가 그녀를 처음 본 날이다. 그녀에 대한 나의 첫 이미지는 '춤꾼'. 지금은 웃음도 안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이미지다. 같이 있던 친구가 지나가던 그녀를 불러 세워 갑자기 춤 동작을 물어봤기에 나는 속으로 '아 엄청 춤을 잘 추는 아이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사실 그녀는 가무에는 영 잼뱅이다. 음주라면 빠지지 않지만. 하하.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고서 급격하게 친해졌다. 공부에는 관심이 없던 우리는 놀기 바쁜 고등학생 시절을 보내고, 각자 대학에 진학했다.


 연극과에 진학했던 나는 사실 연극에 대한 꿈 보다 대학에 가서 더 제대로 놀고 싶은 마음이었다. 남들처럼 간절하지도 않았고, 준비도 터무니없이 부족했는데 늘 운이 좋았던 나는 대학교 역시 단번에 합격이었다. 그래서일까? 나의 첫 대학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연극과는 다른 어떤 과보다 재미있게 놀기만 할 거라는 내 생각이 크나큰 오산이었던 것. 동기들은 동갑보다 언니 오빠들이 더 많을 만큼 재수, 삼수를 기본으로 열심히 준비해서 들어온 사람들이었고, 입학 후에도 엄청난 열정으로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었다. 단순히 놀고 싶어 연극과를 선택한 내가 창피할 만큼 열심이고, 치열했다. 물론 초반에는 나도 나름 열심히 학교 생활을 했다. 공부보다는 노는 쪽에서 이긴 했지만.

 각종 학교 페스티벌엔 빠지지 않고 참여했고, 과 행사에도 꽤나 열심이었다. 댄스 페스티벌을 준비한답시고 춤 연습으로 밤을 새우는 경우는 있어도, 시험 준비로 밤을 새운 경우는 없었다. 단체 기합은 빠지지 않았지만, 수업은 빠졌다. 그런 생활은 결국 학사경고라는 무거운 결과로 돌아왔다. 예술대학 특성상 비싼 등록금과 생활비,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회의감을 느꼈고, 부모님께 죄송했다. 연기나 연극에 큰 뜻을 품지 않은 내가 이렇게 4년을 연극과에서 보내고 졸업을 하고 나면 나는 그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막막하기도 했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 나는 끝내 자퇴를 결정했다. 돌아갈 곳이 없으면 간절하게 공부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신기하게도 같은 타이밍에 이 친구도 자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비슷한 생각들을 하며 지냈던 것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줄곧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우리 둘 다 무언가 결정되기 전 까지는 입 밖으로 잘 내지 않는 타입인 탓에 각자의 사정을 알 리 없던 우리가 우연하게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신기함에 법석을 떨었던 날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함께 재수학원을 등록했다. 생전 공부도 제대로 해보지 않았던 우리가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가겠다는 결심을 했고, 다시 돌아갈 곳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같은 타이밍에 같은 결정을 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그때에도 있었다니! 싶다. 공부만 하면서 보냈던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에도 우리는 부지런히 추억을 만들었다. 가족보다 더 자주 보던 사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에피소드가 넘쳐나던 시기였다.


 각자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녀는 훗날 자기 사업에 대한 생각과 계획을 유일하게 내게만 털어놓았다. 마치 우리가 이렇게 같이 일하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말이다. 먼 훗날의 이야기일 것만 같았던 그 이야기들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생각보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막 가게 계약을 마치고 인테리어 공사에 대한 계획을 하던 즈음, 바로 옆 가게가 한 달 후에 빠진다는 소식을 건너 들었다. 카페와 옷가게가 나란히 꾸며지면 잘 어울리겠다 싶었지만 마음 한켠에 옆 가게가 잘 어우러지지 않겠구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마침 한 달이면 내 가게가 거의 준비를 마칠 그즈음이 아닌가!

 혜정이가 떠올랐다.-여태껏 주욱 늘어놓은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이다.- 회사를 다니고 있기는 했으니 큰 기대를 한 건 아니고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나는 바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쓸 만큼 운명을 믿는 그녀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건 자기가 그 자리로 들어가야 할 운명이라며, 실은 자기가 6월에 퇴사를 한다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퇴사 후 샵을 차리기 위해 부지런히 교육도 받는 중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건 흠칫할만한 타이밍. 신기하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쪼르르 가게를 열었다.


구리시 응달말로 52번 길 62, 주택가의 뒷골목. 구리의 경리단길을 꿈꾸며.

#응리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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