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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자매 Oct 06. 2019

치열한 리모델링과 그 후의 일상 5

사람이 고팠던 한 집순이의 고백


나는 거의 집에서만 생활하는 (집) 안사람이다.

그리고 아싸이기도 하다.

친구들과 야심 차게 만날 약속을 정해놓고 막상 그 날이 오면 비라도 쏟아져서 자연스럽게 약속이 취소되기를 바라는 스타일이다.

약속은 하루에 한 건만 잡는다.


동생은 바깥양반(?)이다.

내 눈에는 우주대인싸이다.

동생은 하루에 세 건 이상의 이벤트를 처리한다.

먼저 회사에 출근했다가, 퇴근하고 미용실에 들렸다가, 밤에 친구들과 공연을 보러 가는 연예인 같은 스케줄을 소화한다(나였으면 3일에 걸쳐할 일이다).


최근에 동생이 2주간 이집트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나는 그 2주 동안 거의 집에서 생활했다. 마침 일도 없어 화분에 새싹 자라는 거 구경하고, 두어 번 따릉이 타고 집 근처 카페에 다니고, 영화 몇 편을 본 게 2주간 내가 한 일의 전부였다.


하지만 동생은 달랐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다음날 회사에서 새벽까지 야근을 했고, 둘째 날에는 자기 친구들을 불러 집들이를 하더니, 셋째 날에는 올림픽 공원에서 열린 뮤직 페스티벌에 참여했으며, 넷째 날에는 지방에 놀러 갔다. 그리고 다섯째 날부터 일주일간 제주도로 출장을 갔다.


그저 동생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피곤해서 코피가 터질 지경이었다. 매일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다니. 신기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했다. 생각해보면 난 대학 때도 그 흔한 동아리 활동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난 사람들과 뭉치는 걸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생과 같이 단독주택으로 독립한 후 많은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생각만으로도 피곤할 줄 알았는데 집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이 예상외로 즐거웠다. 막차 시간이 다 되어 친구들이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면 내 침대와 여행용 칫솔을 선뜻 내어주며 '자고 가~'라며 붙잡을 정도였다.


그제야 나는 몰랐던 나의 진실을 알게 된다. 나는 사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좋아하는’ 인간이었다. 단지 '외출'이 매우 귀찮았을 뿐.


보광동에서는 일주일에 두어 번씩 친구들이 놀러 왔는데 그때마다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했다. 혼자서 밥을 먹을 때는 손하나 까딱하는 게 귀찮아서 3분 카레나 라면을 주로 먹는다. 설익은 밥만 되는 9900원짜리 초미니 밥솥을 4년 동안 사용했지만 딱히 불만스럽지 않았다.


반면 친구들이 놀러 올 때는 갑자기 내 안에 누워 자고 있던 '요리 꿈나무(이하 '요리 인격')가 깨어났다. 요리 인격은 홍합 크림 스파게티를 만들기 위해 칫솔로 홍합을 박박 문질러 씻는 엄청나게 번잡스러운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연이은 집들이로 크림 스파게티를 열 번 정도 만들고 이제 손 맛으로 간을 맞추는 단계에 들어서자 요리 인격은 다른 요리에 도전했다. 중국 훠궈, 즉석 떡볶이, 어묵탕, 홍합찜, 스콘, 인도식 카레까지 만들더니 집에서 피자까지 구웠다. 하지만 요리 인격은 친구들이 있을 때만 활동하고 친구들이 떠나면 바로 안으로 숨어버린다. 요리 인격이 떠난 자리에서 나는 다시 라면을 끓여 먹는다.


친구들을 초대하면서 가장 보람찬 때가 언제인지 묻는다면 단연 '자고 가는 친구들에게 아침을 먹여 회사로 보낼 때'이다. 친구들은 우리 집이 게스트하우스 같다고 평가했다. 어쩌면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 천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집 집들이는 공사가 끝나고 가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기 무섭게 시작되었다. 첫 스타트는 동생 친구들이 끊었다. 보광동에서 내 친구들과 동생 친구들이 자주 오다 보니 어느새 동생 친구가 내 친구가 되고, 내 친구가 동생 친구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익숙한 얼굴들이 '꺄아~' 돌고래 소리를 내면서 요란하게 등장했다.

 

첫 번째 집들이, 나름 냅킨도 삼각형으로 접어보았다


두 번째 집들이에서는 오랜만에 '요리 인격'이 나타나 토마토 스파게티를 만들고 스테이크를 구웠다. 처음 굽는 스테이크였는데 너무 잘 구워져 요리 인격도 놀랐다고 한다.   


완벽한 굽기의 스테이크였다


집들이가 다섯 번째가 되자 너덜너덜해진 그 인격은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좋은 요리를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에 단골식당인 해방촌의 '해방식당'에서 셰프님께 테이크아웃 요리를 주문했다.

내가 주문한 요리들.

아. 정말 맛있었다.


지라시스시
장어롤
연어회 덮밥
닭가슴살 시저 샐러드
돈까스 커리 덮밥
두툼한 연어회. 역시 셰프님의 요리는 달랐다


지난 추석에는 1층 독서모임의 연례행사인 윷놀이가 우리 집에서 열렸다.

추석에 심심한 사람 모이라고 했더니 많이도 모였다. 집이 하우스를 방불케 했다. 전투적인 윷놀이였다. 윷놀이가 처음이었던 나는 규칙도 모르고 힘차게 윷만 던지다가 만원을 잃었다. 유튜브에 '윷놀이 필승법'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윷놀이 음식. 깨알 김밥 나무 플레이팅
윷놀이를 하며 도긴개긴의 참뜻을 알았다


이제 이 집은 혼자 있는 게 더 어색하게 느껴진다.


가끔 2층 거실에 앉아 있을 때면 1층 마당에서 하는 독서모임 소리가 집 안으로 새어 들어온다. 그럴 때면 창문을 활짝 열어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사람을 귀찮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제 사람들의 목소리에 위안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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