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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e Jul 11. 2019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인간 의지에 대한 인문학

실명이 된다는 건 어떤 걸까요?


앞이 안보인다는 것. 전맹. 저마다 공포의 대상이 모두 다르겠지만, 저는 자다가 문득 눈을 떴을 때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상황이 몹시 공포스럽습니다. 불빛한 줄기도 새어나오지 않는 밀폐된 방에서 잔 적이 있는데, 중간에 깬 저는 정말로 제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실명이 된다는 건 그런 기분일까요? 여전히 무섭습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이라는 단어는 유심하게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최근 뉴욕타임스에서 프랭크 브루니라는 칼럼니스트의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제목은 눈을 감고 쓴다는 것(Wrting With Your Eyes Closed).


나이가 들어 시력을 완전히 읽게 된 환경 변호사가 수년에 걸쳐 소설을 펴냈다는 내용입니다. 그의 나이는 64세. 우리로 치면 환갑은 넘었지만 그렇다고 노인이라 부르기는 애매한 나이. 그런 나이에 시력을 잃는다면, 어쩌면 절망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시력 상실과 그로 인한 정서적인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단 일에서는 한발 물러섰습니다(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쓸 여유 시간이 확보되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또 어떤 의지(determination)가 남아 있다는 점도 떠올립니다.


나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맹인이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걸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보여내야 했다. 이게 나한테는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말을 글로 변환하는 소프트웨어를 구비했고 에디터를 고용했으며 소설을 썼고, 법률 스릴러인 "Drink to Every Beast"를 발표합니다. 소설을 펴낸 그의 기분을 표현한 형용사는 이렇습니다.


ecstatic

[희열에 넘쳤다]


제임스 조이스와 제임스 써버 등 다른 눈이 어두운 소설가와 같은 부류로 묶이게 됐다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어떤 한계를 이겨내는 인간의 힘이랄까요. 장애가 오히려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나 결정적인 계기(epiphanies)가 되기도 합니다.


가장 짙은 안개 속에서도, 가장 어두운 어둠에서도 명료함을 찾을 수 있고, 색깔을 찾을 수 있다. ‘상상력’이 온전하다면.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작가가 있습니다. 실낙원을 쓴 존 밀턴과 아르헨티나 작가인 루이스 보르헤스 등. 이들은 주변 도움도 받았지만 스스로도 강건해졌다고 합니다. 때로는 한계에 부딛혔지만, 오히려 인간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깼습니다.


밀턴은 <실낙원>과 <복낙원>을 모두 시력을 잃은 뒤 썼다고 합니다. 심지어 밀턴은 시력을 잃었기에 작품을 쓸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시력을 잃은 걸, 내면을 비춰보는 것(inner illumination)에 대한 대가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보르헤스는 1977년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작가든 작가가 아닌 사람이든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도구(instrument)라는 걸 믿어야 한다. 궁극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주어질 것이다...수치스러움과 당황스러움, 불운 등 모든 것은 진흙처럼, (인생의 무언가를 위한) 재료로 주어진다. 만약 눈먼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구제받은 것이다. 아무 것도 안보이는 것은 선물이다.


여기서 보르헤스가 지칭한 '선물'은 <보르헤스의 말>에 나온 책을 미뤄 보건데, 이렇습니다.


시력 상실이 준 선물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시간을 다르게 느끼는 것이랍니다. 사람들은 기억도 해야 하고 잊기도 해야 해요...
기억과 망각을 우린 상상력이라 부르지요.


글을 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브루니는 1년 전에 시력 상실 중이라는 걸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는 눈의 뇌졸중으로 알려진 병으로 시력을 잃을 확률이 20%. 그는 앞서서 시력을 잃은 작가들을 탐구하고 실제 시력을 잃은 소설가를 인터뷰한 듯 합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글쓰기는 속기를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글 쓰기는 연결을 위한 노력이며 의미를 찾는 행위이다.

올리버 삭스는 시력 상실로 인해 영감을 받아 쓴 책인 <마음의 눈(The Mind's Eye)>에서 "인간의 발명품인 언어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해야 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우리 모두를, 심지어 선천적으로 맹인인 사람들조차도, 다른 사람의 눈과 함께 보도록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봅니다. 여전히 시력을 잃는다는 건 저에게 두렵고 암담한 일입니다. 노년의 제가 시력을 잃을지 유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힘과 인간의 의지를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어떤 형태로든 불운이 닥칠 수도 있겠으나 중요한 건 그에 대한 반응과 태도인 듯 싶습니다.


보르헤스가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도구일뿐이라 이야기한, ‘긍정력’도 이런 맥락일 것입니다. 궁극에는 그 일을 재료로 삼아 뭐든 이룰 수 있다는 것. 인간은 어떤 어려움에도 굴복하지도 않는, 그래서 강건하고 굳건할 수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게 바로 인간이기에 가능한, ‘인간다움'이겠지요.


더불어 글쓰기는 속기가 아니라는 말, 공감이 많이 갑니다. 무조건 쓴다고 하여 글쓰기가 아니라는 것. 내면을 성찰하고 많은 생각과 느낌을 응집해서 써야 하는 글. 이는 시력이 있든 없든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일겁니다. 글이 지닌 치유의 힘도 이런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엄마. 신문기자
유별나지 않게, 유난하지 않게,
아이를 기르고 싶습니다
일하는 엄마도 행복한 육아를!


매일 밤 뭐라도 씁니다

매일 밤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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