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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흔 Feb 06. 2022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다

은행나무도 홀아비가 된다는데

다리미가 지나간 자리에 기분 좋은 팽팽함이 남는다. 토요일 아침부터 하얀 셔츠를 다리는 두툼한 손은 제법 솜씨가 능숙하다. 진수가 항상 켜놓는 라디오에선 DJ가 촉촉한 목소리로 노래를 소개한다.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 가을이라면 육십 해 넘게 겪었으니 새로울 것도 없지만, 혼자된 후로는 처음 맞는 계절이다.


작년 겨울 아내는 예고도 없이 불쑥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아들 세훈이 결혼한 지 2년째 되는 해였다. 아내는 완고했다. 아들 내외조차 어미의 선택을 존중한다며 이혼 준비를 도왔다고 했다.


몇 번 손찌검을 하고 잠깐 한눈 판 걸 이제 와서 따지냐며 그땐 다들 그러고 살았다는 진수 나름의 항변은, 그러던 사람들 요즘 다 이혼하고 따로 산다는 아내의 대답에 나가떨어졌다.



오랜만에 양복을 차려입고 원룸을 나서는 진수의 휴대폰이 메시지 도착을 알린다. 아들 세훈이다. “이번 달 용돈은 넉넉히 넣었어요. 날이 점점 추워지네요. 아버지 몸조심하세요.”


얼마 전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던 일이 떠오른다. 요즘 전 직장 동료들 경조사가 많아 돈 나갈 일이 많다는, 간접적이면서도 노골적인 주문이었다. 다행히 오늘 조 부장 아들 결혼식에 맞춰 세훈이 돈을 보내 안심이다. 이런 일에 상할 자존심은 작아지고 희미해진지 오래다.


식장을 찾은 그는 축의금 20만원으로 남부럽지 않은 배포를 증명했고, 전 동료들과 식사 자리에선 얼마나 자식을 잘 키웠는지 각자 떠들었다. 언제나처럼 같은 레퍼토리다.



적당히 취해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 진수의 눈에 무언가 걸렸다. 은행나무 가로수를 뽑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나무들은 지극히 건강하고 울창했다. 나라님이 연말이라 돈 쓸 데가 없나, 멀쩡한 나무를 다 뽑아버리게. 술김에 인부들에게 다가가 연유를 물었다.


아유, 은행 냄새가 고약하다고 민원이 장난 아니래요. 그래서 암은행나무들 뽑아 수나무로 교체하기로 구청에서 정했거든요. 이제 여기 은행나무들  홀아비 되는 거죠 , 허허.”


친절한 설명에 실없는 농담까지 덧붙이는 인부에게 진수는 꾸벅 목례를 하고 걸음을 뗐다. 하긴 은행나무는 암나무, 수나무가 서로 마주봐야 열매가 열린다는 얘기를 언젠가 들어본 것도 같다. 은행나무도 홀아비라… 피식 웃는 그의 구둣발에 은행이 뭉개져 구린내가 풍겼다.



방에 돌아온 진수는 문득 장롱 위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언제 마지막으로 열었는지 상자 밖도 안도 먼지가 켜켜이 쌓였다. 연애시절부터 아내에게 받은 편지며 같이 찍은 사진들이었다. 갈라설 때 버릴까 하다 남겨둔 것이다.


가을이라고 괜히 궁상이다, 자조하면서도 진수는 종이꾸러미를 들추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몇 분 정도 대강 편지들을 훑던 그의 손이 멈췄다. 색 바랜 원고지에 바스락 마른 노란 은행잎이 붙어있다.


거기엔 작고 아기자기한 글씨로, 1000년을 마주보며 사는 은행나무처럼 사랑하자는 간지러운 러브레터가 적혔다. 11월 1일, 우연히도 36년 전 오늘이다.


진수는 괜한 일을 멈추고 편지를 다시 상자로, 과거로 봉인한 후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윽고 외투를 걸치고 지갑을 챙겨 다시 현관문을 나섰다. 누구에게라도 안기고 싶은 가을밤이 깊어갔다. (2017년 작)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며 썼던 글을 2017년에 다시 조금 손봤다. 내가 쓴 소설형 작문 중에 당시에 스터디원들에게 가장 좋은 반응을 얻었기 때문에(난 에세이가 아닌 스토리텔링 작문에 유독 약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브런치에도 올려본다.


주인공 '진수'는 당연하게도 아빠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중년에 이혼 당한다는 사실 빼고는 모든 면에서 아빠와 닮았다. 어쩌면 엄마 아빠의 황혼 이혼을 바라고 쓴 글일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분은 2022년 현재까지 여전히 이혼 안 하고 함께 살고 계시다.


진수가 36년 전 러브레터를 들춰봤듯이, 아빠도 연애시절 엄마가 보낸 연애편지를 오랫동안 갖고 있다. 어렸을 때 우연히 그 편지 뭉치를 아빠 서랍에서 발견하고 훔쳐봤다. 엄마 아빠한테도 그런 간질간질한 시기가 있었음에 놀랐다. 그리고 현 부인 전 여친이 보낸 연애편지를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애정하는 마음은 하나도 남지 않은 듯한 아빠의 모습에 약간 괴이함까지 느꼈다.


결말에 진수가 지갑을 챙겨 외출하며 '누구에게라도 안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매매를 암시한다. 글을 첨삭하던 교수님(男)이 잘 썼다고 칭찬했다가, 결말의 의미를 알려드리자 이해할 수 없다며 질색하시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진수는 아주 약간 불쌍하되 많이 혐오스러운 캐릭터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전히 진수라면 그런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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