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흔 Feb 13. 2022

할머니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해도

할머니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할머니가 오늘 돌아가셨대. 엄마가 장례식장 잡아서 알려준다니까 회사에 말하고 준비하고 있어.”     


회사에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큰언니한테 메시지가 와있었다. 언젠가는 닥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당연히 몰랐다. 할머니 건강이 안 좋아져서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는 얘길 들은 게 겨우 일주일쯤 전이었다. 당연히 밥이고 일이고 뛰쳐 나가야 하는데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하얬다.     


일단 엄마, 남편한테 전화하고, 사무실 사람들한테 얘기하고, 앉아서 배달 온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하필 그날따라 평소랑 달리 자가용 출근했는데, 시골 가려면 차가 필요하니까 최소한 우리 집까진 내가 운전해서 가야 했다. 바로 운전하면 사고가 날 것 같아서,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사무실 사람들은 괜찮냐고 물어보며 퍽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묵묵히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밥 덩이를 처넣다가 오히려 더 체할 것 같아 꾸벅 인사하고, 의뢰인들한테 며칠 연락이 안 될 거라고 얘기하고, 마감이 닥친 서면을 약간 정리한 다음 사무실을 나왔다.     


집에 와서는 출발을 기다리며 애니메이션을 봤다. 언니들도 저녁에야 도착한다는데 일찍 가봤자 아빠 얼굴 보고 속만 부대낄 것 같았다. 대충 언니들과 비슷하게 도착할 시간까지 버티면서 아무 생각 없이 노트북 화면만 봤다. 눈물도 안 나왔다. 그냥 그때까지도 믿을 수 없었다.

   

할머니 하얀 블라우스에 범벅이 된 새빨간 피


할머니한테 가는 길, 수십 분을 멍하니 창밖만 봤다. 남편은 그런 나를 신경 쓰다가 문득 말했다. 할머니랑 어떤 추억이 있어? 나는 되물었다. 울리려고 그런 걸 묻는 거야? 픽 웃다가 비로소 눈물이 터져버렸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상행동을 하던 내가 비로소 할머니를 추모할 수 있게 남편이 도와준 셈이었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피 묻은 블라우스가 생각나. 흰 블라우스에 내 피로 범벅이 됐었어.”     


대여섯 살 때 일이자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당시 우리 집은 작은 마당이 있는 단층 주택의 단칸방에 세를 살고 있었고, 할머니는 농사일이 바쁠 때가 아니면 서울에 올라와서 우리를 돌봐줬다. 그날 언니들은 나가서 친구들이랑 놀고 있었고, 나는 언니들이 뭘 하고 있나 궁금해서 2층 높이 옥상에 올라갔다가 난간 밑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마당의 시멘트 바닥이 아니라 고무 뚜껑 같은 데 떨어져서 다른 데는 무사했다. 문제는 얼굴부터 떨어지면서 혀를 깨물었는지 입에서 피가 철철 났다.     


쿵 떨어지는 소리, 내가 시름 하는 소리를 듣고 할머니는 마당으로 나왔다가 기겁을 했다. 엄마, 아빠가 집에 없던 터라 할머니는 급한 김에 옆집 아줌마한테 가서 “애가 쎄가 찢어졌다, 쎄에서 피가 난다”라고 도움을 구했는데, 아줌마는 쎄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무척 당황해했다고 한다. 이 대목만은 기억이 아니라 전해들은 얘기다. 엄마는 이 얘기를 할 때 항상 “할머니가 쎄라고 하니까 그 아줌마는 못 알아듣지~”라고 말하면서 킥킥, 웃음을 참지 못하곤 했다.     



아무튼, 할머니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엉엉 우는 나를 업고 병원으로 달렸다. 할머니 머리도 새까맣고 젊을 때라 업고 뛸 수 있었겠지. 찢어진 혀가 아픈 나는 업힌 채로 할머니 어깨에 혀를 막 문댔다. 혀를 꿰맬 때도 할머니한테 업혀 있었는데, 너무 아프고 무서워서 주사 한 바늘 찌를 때마다 할머니 어깨로 숨었다. 그래서 젊은 할머니의 하얀 공단 블라우스가 온통 ‘쎄’에서 나온 피로 엉망이 됐다. 그 하얗고 빨간 작은 어깨가 내 안에 자리 잡은 할머니의 이미지였고, 할머니를 사랑하는 이유였다.     


할머니가 괴팍한 노인네라는 걸 알게 된 건 이미 할머니를 사랑한 이후였고     


아주 어릴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여름방학 42일 중 40일은 시골에서 보냈고 할머니도 1년의 몇 개월은 서울 우리 집에서 보냈으니 유대감이 깊은 편이었다. 쎄가 찢어지는 등 사건, 사고도 있었고, 또 할머니는 유독 나를 예뻐했다(언니들과 남동생은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태어날 땐 셋째 딸이라고 한숨 쉬었지만 의외로 자랄 땐 남동생만 특별히 귀여워하시지 않았다. 속삭거리며 내가 제일 좋지? 물어보면 할머니는 활짝 웃으며 그렇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다 똑같다고 답할 때가 더 많긴 했지만.


할머니가 밭 매러 가면 언니들, 동생과 시골집 뒤 잿마당에서 하릴 없이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기다려도 할머니가 오지 않는 길.


나한텐 너무 사랑하는 할머니지만, 어쩌면 다른 사람들한텐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늦게 깨달았다. 그렇다고 사랑을 거둬들일 수 없었다. 첫 기억은 중학교 1, 2학년 무렵이다. 할머니는 구시대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편견이 있었고, 특히 편부모 가정에 대한 편견이 무척 심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집에 오면 할머니는 “너희 아버지 어머니는 다 계시니”라고 묻곤 했던 것이다. 아마 할아버지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서 생긴 할머니의 컴플렉스였던 것 같다.


처음엔 몰랐다. 공교롭게도 부모님이 이혼해서 조부모와 살고있던 친구가 우리 할머니에게 그 질문을 들은 뒤에, 뭐라 답하기 어려웠다고 말해줘서 알게 됐다. 나는 너무 당황하고 미안한 나머지 오히려 충분히 그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지금 떠올려봐도 정말 미안하고, 어린 나이에 친구가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할머니는 늘 그랬다. 당신이 뭔가 옳다 그르다 믿으면, 그게 아무리 사회적으로 비상식적이어도 절대 굽히지 않고 표출하고 행동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들어 먹히지 않았다. 같이 살던 며느리(젊은 우리 엄마)를 황당한 이유로 집에서 내쫓았고, 고양이털이 기관지에 안 좋다며 우리가 키우던 고양이를 옆 동네에 버렸다(다행히 한 달 만에 찾았다). 언니들과 내가 결혼할 땐 사돈 쪽한테 백 원 한 푼도 보태면 안 된다고 강짜를 부렸다. 그러면서 내 결혼식엔 '늙은 사람이 좋은 행사에 가면 추해보인다'라며 안 오셨다. 괜찮다고 할머니 보고 싶다고 애걸복걸해도 안 통해서, 내 결혼 사진엔 할머니가 없다.


할머니 때문에 집안이 몇번 풍비박산 났다. 화를 내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아무도 할머니 고집을 못 이겼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가 싫어할 만한 일은 거짓말로 숨긴 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성격에, 저 꽃분홍 루즈는 큰일 났다     


상주로 처음 참여하는 장례 절차는 모든 게 낯설었다. 특히 입관은 ‘살을 지져서 베인 아픔을 잊게 하는 건가’ 싶을 만큼 잔인하고 힘든 시간이었다. 죽은 사람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다 그게 내 할머니의 시신이라니. 제정신을 차리고 서있기 어려울 만큼 온몸이 떨렸다.     


와중에 정신이 또렷해진 순간이 있었다. 가족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기 전에, 장례지도사들이 할머니의 머리를 감긴 뒤 간단히 화장(makeup)을 해줬다. 그런데 루즈가 바비 인형이 바를 법한 밝은 꽃분홍색이었다. 아, 저건 선 넘었지. 정신없이 오열하다가 눈을 찌푸렸다. 할머니는 립스틱을 거의 안 발랐지만, 만약 칠한다 해도 저런 색은 절대 절대 안 발랐다.     


핏기없는 푸른 얼굴이 산 사람 눈에 좋아 보이지 않아서 뭐라도 칠을 하는 거겠지만서도. 남성 시신에도 저런 색을 바르나? 아무리 말 없는 고인이라지만 취향 몰살 너무 심하다. 우리 할머니 성격에 저건 못 참지. 그런 생각을 하느라 잠깐 눈물이 쏙 들어갔다. 관 속에 누운 할머니한테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는 우느라 다른 생각 못 했지만.     


할머니 마지막 길인데, 분위기 읽느라 장례지도사님들께 차라리 다홍색이나 붉은색을 발라달라고 한 마디 얘기 못 드린 게 내내 아쉽다. 생전 할머니한테 그런 연핑크 루즈를 발라보라 했으면 틀림없이 “마라! 마라!” 역정을 냈을 텐데. 하늘에서 할머니가 입술이 이게 뭐냐고 “마라! 마라!” 화내고 있을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다. 난 할머니랑 달리 다른 사람 눈치를 좀 보는 성격이라 어쩔 수 없었어, 미안.


할머니 성격 진짜 못 말려, 왜 저러시나 몰라, 푸념하면서도 가끔은 할머니 뜻대로 맞춰주고 싶을 때가 있었다. 맞추든 안 맞추든 할머니 고집을 꺾을 수 없기도 했거니와, 비록 비뚤어진 방향이라도, 누가 보면 욕할지라도, 할머니의 속마음은 언제나 늘 자식과 손주를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했음을 아니까. 남이 뭐라든, 오로지 자기 방식대로 브레이크 없이 살아온 할머니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