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나 밴쿠버에서나 변함없이 지속되는 일상이 차(Tea)라면, 결혼 후 밴쿠버에서 새롭게 시작한 것도 있다. 그것은 바로 스키이다. 아웃도어 스포츠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는 지금껏 전혀 모르고 살았지만, 밴쿠버는 아웃도어의 성지였다. 이곳 현지인들은 겨울에는 스키, 스노보드, 스노슈잉, 스노우모빌링 등 겨울 스포츠를 즐기고, 눈이 녹으면 그 산에서 하이킹, 암벽 등반, MTB를 즐긴다. 호수와 바다에선 카약킹이나 패들보딩을 하고, 국립공원으로 캠핑을 간다. 밴쿠버가 왜 룰루레몬과 아크테릭스의 고향인지 이해가 되는 지점이다.
특히 남편에게 스키는 그의 유일한 취미이자 그가 밴쿠버를 떠날 수 없는 이유였다. 그에게 밴쿠버는 천국이다. 밴쿠버 다운타운 근처에는 차로 30여분 거리에 사이프레스(Cypress), 그라우스(Grouse), 시무어(Seymour) 스키장이 있고, 차로 1시간 40분쯤 달리면 세계 최고의 스키 리조트 중 하나로 손꼽히는 휘슬러(Whistler)가 있다. 남편과 연애 시절, 한여름에 휘슬러에 간 적이 있다. 곤돌라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 다시 리프트를 갈아타며 ”근데 여기 어디가 스키장이야? “라고 묻는 내게 그는 ”눈이 오면 이게 다 스키장이야 “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곳은 휘슬러, 블랙콤 두 개의 산이 하나의 리조트로 구성된 북미 대륙 최대의 스키 리조트였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며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응? 저기 곰이 있는데?” 더 놀라운 건 그 곰 옆을 MTB를 탄 어린이들이 줄지어 쌩쌩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기가 캐나다구나.
남편은 농담처럼 자기는 이제 자신의 전생을 알 것 같다고 했다. 시베리안 허스키. 눈만 오면 미친 듯이 달려 나가고 싶고, 코끝이 시려오면 가슴이 두근두근 해지는 존재. 폭설이 오면 그렇게 아침잠 많은 사람이 새벽 5시에 벌떡 일어나 휘슬러로 향한다. 파우더(아무도 타지 않은 뽀송뽀송한 상태의 눈)를 타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출발하는 남편을 향해 눈이 많이 쌓여 있을 테니 눈길 운전 조심하라고 한 말이 무색하게도, 그런 날 휘슬러로 향하는 도로에는 차가 가득하다고 한다. 파우더를 타기 위해 그 새벽 폭설을 뚫고 스키장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 것이다.
남편과 한 시즌 스키를 타면서 이 사람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스키에 몰입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헬리콥터를 타고 스키장 슬로프가 아닌 산악지대를 가이드와 함께 다니는 헬리스킹(1인당 비용이 수백만 원이라고 한다), 스키를 신고 산을 걸어 올라가 정설 되지 않은 자연 상태의 눈을 타는 백컨트리 스킹(내려오기도 힘든데 스키를 신고 걸어 올라간다니), 평지나 완만한 경사를 따라 트레일을 가로지르는 크로스컨트리 스킹 등 내가 알지 못했던 스키의 세상은 너무나 광활했다. 이곳 스키장을 갔을 때 놀랐던 것은 아이들이 많다는 거였다. 어린이가 아니라 아이가. 이제 막 걷고 뛰는 아이들에게 스키를 가르치고, 등에 아이를 업고 스키를 타는 아빠들, 유모차를 들고 올라와 번갈아가며 한 번씩 스키를 타는 엄마 아빠들. 이 사람들, 정말 스키에 진심이다.
남편에겐 원대한 꿈이 있었다. 결혼 후 나와 함께 주말마다 스키장에 가는 큰 꿈. 결혼식도 하기 전 그는 내 휘슬러 시즌권까지 미리 구입해 놓고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밴쿠버에 도착하자마자 스키 장비들과 스키복을 사러 갔다. 내게 스키복을 입히며 뿌듯한 아빠 미소를 짓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의 스키 실력이었는데 나는 스키의 '스'자도 모르는 생초보였다. 추위를 많이 타 겨울 스포츠를 즐길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고,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서 한여름에도 선크림을 들이붓지 않으면 야외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여러모로 야외스포츠에는 취약한 인간인지라 그동안 내가 했던 운동은 필라테스, 요가, 댄스 등 실내에서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대학 시절 스키 강사 출신이 옆에 있으니 그를 믿고 천천히 스키를 배워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스키 인생을 불행인지 행운인지 북미 최대의 스키 리조트 휘슬러에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