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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머리영 Jan 06. 2021

영혼 없는 남자. 2

이게 다 너 때문인 걸로 하자

Happy Snowman

둘째랑 은파호수 살짝 걷고 들어오는데,
상가 미용실 앞에 울라프가 뙇!

대학 때 약국에서 알바를 했는데,
약사님 남편이 조각가셨다.
큰 딸의 모습을 나무로 조각해서 약국 앞에 세워두셨는데~

그때 생각도 나고,
울라프가 너무너무 귀여워서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었다.

아마 지금쯤 노래를 부르며 탭댄스를 추고 있겠지!
In Summer~


#울라프


sns에 이렇게 사진이랑 글을 올리고 나니, 더욱 그 시절 생각이 나는 것이다.


약국 주인이, 아 그러니까 약사님이 바뀌고 약국을 확장한다는 소문만 전해 듣고는 알바를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닌가, 이렇게 짤리는 건 아닌가 하고 노심초사했었다.


막상 새로운 약사님을 만났을 때에,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오히려 내가 그만두는 건 아닌지 물으시며 계속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셨으니까.

 

게다가 한 번도 불린 적 없고, 내 이름조차 모르셨을 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나는 '저기'에서  '효영 씨'가 되었다.


약사님의 아이들은 어린이집이 끝나면 큰집에 있었는데 마침 우리 아파트 옆 단지였다. 다시 생각해봐도 우연치고는 너무 기가 막힌다.


덕분에 막차를 놓칠까 걸음을 재촉할 필요가 사라졌다. 막차를 놓쳐서 가진 돈만큼만 택시를 타고 가다 중간에 내릴 걱정도 없었다. 전용 차량이 생겨버린 상황은 마치 그동안의 설움을 모두 씻겨주는 믿기지 않는 반전이었다.


어느 날에는 그대로 심야영화를 보러 갔다. 자정이 다 되어 충장로에 나가 본 첫 심야영화였다. 약사님 부부는 부모님께 전화까지 해주셨다.


"어머니 먼저 주무세요. 오늘 효영 씨랑 영화 보고 안전히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약사님은 문 닫기 직전에, 개봉한 영화 제목을 말했을 뿐이고, 모든 진행은 남편인 조각가 아저씨가 하셨다.




상가 앞 울라프의 등장으로 옛 기억을 소환했다. 여기까지 였어야 했다.


내 인생  가장 외로웠던 여름을 살아낼 수 있었던 수많은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던 분들. 그들을 떠올리며 느끼는 충만한 기쁨. 딱 여기까지!


나는 어쩌자고 가고 없는 이를 떠올렸는가?

너는 어쩌자고 있지만 없는 이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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